수화 중계하다 “어머나” ‘모니터 바바리맨’ 공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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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언어장애인 영상통화 중계사들 성폭력에 눈물

수화통역사였던 이모 씨(32·여)는 석 달 전 일을 그만뒀다. 그는 3년간 한국정보화진흥원 산하의 손말이음센터에서 일했다. 직접 통화가 어려운 청각·언어장애인을 위해 영상으로 수화 통역을 하는 일이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돕는 것에 보람을 느꼈지만 눈물을 머금고 사직했다. 계속 일을 하기엔 정신적 고통이 너무 컸다.

이 씨는 입사 2주 만에 ‘그 사건’을 당했다. 영상중계 프로그램을 켜자 모니터에 아랫도리를 벗은 남성이 나타났다. 이어 카메라 앞에서 음란 행위까지 했다. 동료들이 말한 ‘모니터 성폭력’이다. 이 씨는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 전원을 껐다. 그리고 한참 오열했다. 계속 일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콜’이 너무 많아 조퇴도 못 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콜센터마다 음란전화를 거는 악성 민원인이나 고객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수화기 너머에서 음성으로 이뤄지는 성폭력이다. 모니터를 통한 영상 성폭력은 충격이 더 크다. 이 씨도 병원에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모니터 성폭력을 당했다. 가해자 중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있었다. 속옷만 착용하거나 아예 벌거벗은 남성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히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손말이음센터는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후 장애인의 일상생활을 돕기 위해 설립됐다. 말 대신 수화로 사람을 이어준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이용량은 매년 늘고 있다. 26일 한국정보화진흥원에 따르면 2007년 10만8315건에서 지난해 69만1579건으로 급증했다. 현재 센터에서 수화 통역을 맡고 있는 직원(중계사)은 30명이다. 지난해 37명에서 1년 사이 7명이나 그만뒀다. 진흥원 측이 적정 수준으로 본 40명보다 10명이나 적다. 이용은 늘어나는데 직원은 줄다 보니 한때 90%에 육박하던 응대율(중계율)도 70%대로 떨어졌다.

지난해 말 황모 씨(29·여)도 야간근무 중 ‘모니터 성폭력’을 당했다. 영상중계 화면을 켜자 모니터 속 남성은 불쾌한 행동을 반복했다. 황 씨는 “지금도 이용자가 갑자기 손으로 카메라를 가리거나 피부가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으면 너무 긴장돼 구토까지 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비슷한 피해가 일상처럼 나타나고 있지만 센터 측의 대응은 예방과 치료 모두 부실하다는 게 직원들의 주장이다. 2년간 근무하다 올 상반기에 그만둔 유모 씨(23·여)는 “한 달에 2, 3회 같은 일을 겪지만 센터 측은 ‘가해자에게 e메일로 경고했다’며 안심하라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성폭력 직후 직원들이 후유증에 시달려도 인력 부족 탓에 곧바로 업무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또 얼마 전까지만 해도 e메일 정보 입력만으로 이용이 가능해 가해자 처벌이 쉽지 않았다. 센터에 따르면 지금까지 중계사를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이용자 중 실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2015년 12월 비장애인 이용자 한 명이 전부다. 센터 관계자는 “현재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휴대전화 인증을 받도록 바꾸면서 가해자의 이용을 차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중계사를 위한 트라우마 치료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센터 측은 성폭력 피해 때 진흥원 내 인터넷중독상담센터와 연결해 주고 있다. 센터 관계자는 “성범죄 상담 전문기관은 아니지만 같은 건물에 있어 빨리 상담을 받도록 연결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흥원 측은 “내년에 예산이 확보되면 시설을 개선하는 등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외부 전문병원을 추가로 지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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