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뉴욕 음악회장의 리용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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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때론 현실이 영화보다 더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23일(현지 시간)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 머킨콘서트홀 앞. 어둠이 깔리자 카메라를 둘러멘 한국과 일본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8시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직원 및 가족들이 대거 참석하는 친북 성향 한인단체 주최의 음악회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뉴욕 밤거리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동양 언론인들의 취재 경쟁에 미국인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호기심을 보였다. 한 행인은 “오늘 케이팝 스타가 오느냐”며 취재진을 붙들었다. ‘북한 외무상이 온다’는 말에 또 다른 한 행인은 “북한 사람들이 여기서 뭐 하느냐. 그들이 음악회에도 다니느냐”며 깜짝 놀랐다.

이날 리 외무상은 세계인이 지켜보는 유엔 총회 연단에 올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정신이상자’ ‘거짓말의 왕초’ ‘최고통사령관’ ‘악통령’ ‘늙은 투전꾼’ 등의 폭언을 쏟아냈다. 미국을 향해 ‘선제행동’을 위협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비난했다. 그런 그가 국제기구 인사들을 만나 대북 지원을 요청하고 다섯 시간 뒤 태연하게 음악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유엔에서 말폭탄을 쏟아내기 직전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가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 원산 동쪽 350km 지점 공해상을 날았다. 북-미 간 군사적 긴장이 위태로운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상황이었다.

이날 음악회는 표를 사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행사였다. 하지만 극장엔 포스터도 붙어 있지 않았다. 입구에선 보안요원이 금속탐지기까지 들고 입장객을 샅샅이 검색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와 대통령을 위협한 북한 외무상을 철통같이 경호하는 뉴욕 경찰도, 그를 위해 북한 음악을 연주하는 미국 오케스트라 단원의 현실도 묘했다. 공연 전에 만난 한 오케스트라 단원은 “공연을 위해 1주일을 연습했다. 북한 음악도 연주하는데 리듬과 화음이 소비에트 음악과 비슷하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북한 외무상을 만나면 보수가 너무 짜다(underpaid)는 걸 꼭 말해 달라”며 웃었다.

이날 북한 수도 평양에선 10만 군중이 모여 미국을 규탄하며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로 몰아갔다. 하지만 뉴욕 음악회에선 전쟁의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한대표부 직원 가족으로 추정되는 부인들은 파티에 온 사교계 여인들처럼 한껏 멋을 내고 연주회를 찾았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사서 들고 온 아들에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입고 왔느냐”고 타박하는 북한 관계자의 모습은 여느 아빠와 아들처럼 자유로웠다.

굳은 표정으로 호전적인 발언을 쏟아냈던 리 외무상도 두 시간 넘게 진행된 음악회가 끝난 뒤 모처럼 웃으며 행사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직원은 리 외무상의 일정을 묻는 기자에게 “모르디요. 홍길동이디요”라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통역까지 대동하고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말폭탄을 쏟아낸 ‘홍길동 외무상’에게 쏟아지는 세계 언론의 관심을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홍길동 외무상’은 유엔 연설에서 “핵 개발의 최종 목표는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북한이 소원대로 핵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평양 한복판에서 적대국 편향 음악회를 허용하는 관용과 누구나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반팔, 반바지를 입고 편안하게 음악회에 올 수 있는 삶의 질과 자유를 국민에게 선물하지 못한다면 ‘핵보유국 지위’는 눈뜨면 사라지는 한여름 밤의 미몽일 뿐이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리용호#북한 외무상#유엔 총회 연단#트럼프#안보리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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