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 트럼프親書 받아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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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북-미 간 공갈 게임에서 북한 김정은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졌다. 기세 싸움에서 밀린 셈이다. 김정은이 ‘8월 중순’까지 괌 포위사격 여부를 결심하겠다고 위협하자 트럼프는 ‘8월 15일’로 날짜를 콕 집어 “그때 두고 보라”라며 응징을 별렀다. 아니나 다를까. 김정은은 14일 보고를 받고 “미국 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보겠다”고 했다. 북한 매체는 이를 15일 아침 보도했다. 트럼프가 정한 시한 직전에 꼬리를 내린 것이다.

북한 전략군사령부가 8, 9일 잇달아 괌 포위사격 방안을 “심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했을 때부터 트럼프는 북한의 ‘공갈’임을 간파했고, 자기가 정한 날짜에 답을 내놓도록 몰아붙였다. 그러고는 “김정은이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며 자신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거친 반격으로 불확실성을 높이고 자기 스케줄대로 상대방을, 나아가 주변의 관전자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게임의 고수답다.

트럼프 1勝… 조율된 승패?

그렇다고 김정은이 완패한 것은 아니다. 일단 한발 물러섰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김정은의 괌 타격 유보 결정이 북한 매체에 공개되기 직전 미국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이례적으로 미국 신문에 낸 공동 기고문을 통해 북한 정권교체, 정권붕괴, 흡수통일, 38선 침공은 없다는 이른바 ‘4노(No) 원칙’을 거듭 확인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공개 석상에 일주일 만에야 나타난 김정은은 이제 미국을 향해 협박하는 대신 미사일 연구소를 찾아 생산능력을 은근히 과시했다. 마치 협상을 앞두고 몸값을 올리겠다는 듯한 행보다. 자극적 언사를 자제하던 트럼프도 급기야 ‘김정은의 미국 존중을 존중한다’는 묘한 말과 함께 “뭔가 긍정적인 게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진한 여운을 남겼다. 북-미 간 비밀 접촉이 깊숙이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지금은 한미 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이 벌어지는 예민한 시기인데도 일촉즉발의 팽팽했던 긴장감은 언제 그랬나 싶게 누그러졌다. 별 탈 없이 UFG 훈련이 끝나면 북-미는 머지않아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양측은 테이블에 앉기 전 막판 밀고 당기기에 한창인 듯하다. 트럼프가 두 차례나 쓴 ‘존중(respect)’이란 단어가 주목되는 이유다. 대화의 시작은 상호 ‘존중’에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트럼프의 입에서 나오는 체제 보장 ‘4 No’ 약속일 것이다. 아버지 김정일이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은 미국 대통령들에게서 줄줄이 안전보장을 약속받았다. 대통령 3명의 친서도 받았다. 빌 클린턴은 서한에서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각하(His Excellency Kim Jong Il, Supreme Leader of the DPRK)’라고 칭했고, 조지 W 부시는 ‘친애하는 위원장 선생(Dear Mr. Chairman)’이라 불렀다(버락 오바마는 내용 공개를 거부했다).

절실한, 너무 절실한 ‘보장’

북한의 요구가 트럼프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정권 기반이 취약한 나이 어린 김정은에겐 더욱 절실할 것이다. 트럼프도 조금씩 움직이는 듯하다. 지난달 초 “이 친구(this guy)는 할 일이 그렇게 없나”라고 했던 트럼프지만 일주일 전 트윗에선 ‘북한의 김정은(Kim Jong Un of North Korea)’이라고 칭했다.

물론 트럼프는 역주행이나 다른 길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북한 체제, 나아가 김씨 일가에 대한 안전보장을 토대로 만들어진 수많은 합의가 예외 없이 실패로 끝난 사실을 타고난 협상가 트럼프가 간과할 리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김정은#트럼프#괌 포위사격#한미 연합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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