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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회 여동생’에 막걸리 얻어먹고… 기형도가 건넨 詩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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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회 여동생’에 막걸리 얻어먹고… 기형도가 건넨 詩 3편

조종엽기자 입력 2017-06-20 03:00수정 2017-06-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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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지은 미발표 시 햇빛
“밥값 대신 수표 하나 써 줄게”… 방위병 복무시절 문학회 활동 중 써
기형도 시인이 1982년 한 여성에게 써서 건넨 미공개 연시(戀詩) 세 편 중 한 편. 박인옥 시인 제공
“(밥값 대신) 수표 하나 써 줄게.”

1982년의 어느 날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경기 안양의 수리문학회 활동을 하던 기형도 시인(1960∼1989·사진)이 문학회와 가까이 지내던 한 살 어린 여성 A 씨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라면과 막걸리를 얻어먹은 차였다. 기 시인은 그 자리에서 갱지에 볼펜으로 시를 써서 A 씨에게 건넸다.

“당신의 두 눈에/나지막한 등불이 켜지는/밤이면/그대여, 그것을/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당신이 기다리는 것은/무엇입니까, 바람입니까, 눈(雪)입니까/아, 어쩌면 당신은/저를 기다리고 계시는지요/손을 내미십시오/저는 언제나 당신 배경에/손을 뻗치면 닿을/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읍니다”

A 씨가 보관해 오던 시가 19일 공개됐다. 박인옥 시인(한국문인협회 안양지부장)이 A 씨의 동의를 얻어 내놓은 것이다.

당시 기 시인을 비롯해 박인옥 홍순창 유재복 등 수리문학회원들은 동인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안양의 헌책방 ‘독서당 수리’에 자주 모여 서로의 작품을 품평했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그들은 A 씨가 헌책방에 오면 라면이나 막걸리를 사달라고 자주 청했다고 한다. A 씨는 1982년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전철역 부근 선술집에 앉아 쭈그러진 냄비에 라면을 먹었다. 셋이서. 그리고 커다란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마셨다. … 그의 24살의 눈을 기억한다.”

1989년 A 씨는 기 시인의 부고를 들었다.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 초판 2쇄를 샀고, 시집 뒤편에 기 시인이 시를 써 건넨 종이를 붙여 놨다.

“형도 오빠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뛰어났어요).”


박인옥 시인이 동아일보에 전한 A 씨의 회고다. A 씨는 “형도 오빠가 저를 좋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굉장히 잘해 줬던 것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기 시인이 A 씨에게 ‘밥값 대신’ 건넨 시는 2편이 더 있다. 육필로 쓰인 이 시들은 경기 광명시에 건립 중인 기형도문학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당신에게/오늘 이 쓸쓸한 밤/나지막하게 노크할 사람이/있읍니까/…/나는 그대에게 최초로/아름다운 한 점 눈(雪)으로/서있을 것입니다”

“…아, 하루에도 언제나/긴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그 강물에 당신의 영혼이/미역을 감는 밤/아세요./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튀어올라 물보라치는/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형도 시인#박인옥 시인#독서당 수리#안양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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