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점령군’의 正義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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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 모양 다른 철원 승일교… 그들은 왜 北으로 피란 갔을까
前 정권 부정하는 ‘否認의 시절’… 살려고 눈치 보는 ‘위험한 계절’
文 소탈·파격 속 ‘청산의 칼’… 정권 바뀌었다고 다 뒤집는 건 제왕적 대통령제 또 다른 얼굴

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강원 철원에 가면 승일교라는 다리가 있다. 지금은 노후화해 쓸 수 없는 다리지만, 아치형 교각을 살펴보면 북쪽과 남쪽의 모양이 다르다. 철원은 6·25전쟁 이전에는 38선 이북의 북한 땅이었다. 1948년 북한 당국이 착공했으나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1952년 미군 공병대가 공사를 재개해 1958년 완공됐다. 처음에 러시아식, 나중엔 미국식 공법을 적용해 아치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다리 하나에 전쟁과 분단의 기억이 담겨 있다.

이름이 승일교인 것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승’과 북한 김일성(金日成)의 ‘일’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58년 개통할 때 6·25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박승일(朴昇日) 연대장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은 “철원 사람들의 정서에는 전자가 더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6·25전쟁이 나자 철원 주민의 80%는 북으로 피란을 갔다”고 했다. 북쪽으로 피란을 갔다? 생전 들어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이 났을 때 철원은 북한 땅이었고, 전쟁터는 남쪽이었다. 전쟁을 피하려면 북쪽으로 갈 수밖에. 피란 가지 못한 일부 주민은 산에다 토굴을 파고 생활했다고 한다. 철원 토박이인 김 소장은 토굴에서 지냈던 어른들께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 중 어느 쪽이 철원에 진주했을 때 내려가야 안전할까, 피 말리는 고민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 소장은 “철원은 38선과 휴전선에 갇힌 섬”이라고 규정했다.

지난 주말 철원 답사여행을 했다. 남과 북, 38선과 휴전선 사이에서 갈등했던 철원의 역사를 들으며 작금의 정치 상황이 머리를 스쳤다. 대한민국은 대선 때마다 정치적 전쟁을 치른다. 바로 지금이 승자와 패자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는 시기다. 전 정권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부정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치를 봐야 하는 위험한 시기다. 통일부는 제재와 압박 위주로 흘렀던 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부인(否認)의 시절이다. 집회 안전을 우선시해야 할 경찰청이 스스로 ‘시위 현장에 살수차와 차벽을 없애겠다’고 고해성사를 하는 혼돈의 계절이다.

취임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면 ‘더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이 들어맞는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는 전임 대통령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소탈·파격 행보로 국민의 마음을 얻으며 준비한 국정 플랜을 쏟아내고 있다. 양복 상의를 경호원 도움 없이 손수 벗고 커피를 직접 따라 마시며 가족 식비를 대통령 월급으로 충당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지 않게 행해졌던 때 느꼈던 국민의 갈증을 문 대통령은 사이다처럼 풀어주고 있다. 인사 발표도 직접 하고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마자 대책회의를 소집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대통령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박 전 대통령이 얼마나 할 일을 안 했는지, 이제 알겠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9년을 겨냥한 소위 ‘적폐청산’은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소탈과 파격 행보 속에 숨겨진 칼날, 그것이 문 대통령의 무서운 점이다. 새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과 어긋나는 발언을 한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부회장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 경총은 반성하라’고 경고했다. 취임 보름이 갓 지난 대통령으로부터 공개 경고를 받았으니 김 부회장은 모욕감과 함께 공포감까지 느꼈을 법하다. 불현듯 2004년 3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형인 노건평 씨에게 로비한 사실을 들먹인 뒤 대우건설 사장이 자살한 사건이 떠올랐다. 서슬 퍼런 임기 초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그만큼 무섭다.

문 대통령은 1월 펴낸 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우리 진보진영 내부의 비판이나 진보언론의 비판에는 굉장히 아파하고 귀를 기울였다”면서도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공격에는 “전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전 국민의 대통령이 된 만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도 아파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이 바뀌고 새 ‘점령군’이 들어설 때마다 가치가 전도(顚倒)되고 심지어 사회 정의의 개념까지 흔들리는 혼돈의 대한민국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모든 것이 뒤집히는 건 제왕적 대통령제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청산의 칼#승일교#적폐청산#문재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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