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기자의 지금, 여기]“文대통령 연설, 盧 前대통령보다 강렬함 빼고 감성은 더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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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대통령연설비서관 강원국

8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써온 강원국 전 대통령연설비서관. 17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국민 개개인의 말과 글이 살아야만 서로 다른 생각이 섞여 융합과 통섭, 창조가 이뤄지고 국운이 융성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부터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진정성 있는 연설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8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써온 강원국 전 대통령연설비서관. 17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국민 개개인의 말과 글이 살아야만 서로 다른 생각이 섞여 융합과 통섭, 창조가 이뤄지고 국운이 융성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부터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진정성 있는 연설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전승훈 기자
전승훈 기자
《 “리더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글을 못 쓴다는 것은 국정의 향방을 결정할 자신의 시각과 견해, 관점이 정리가 안 돼 있다는 뜻이죠.”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 8년간 대통령 연설을 담당했던 강원국 전 대통령연설비서관(55). 그는 2014년 초 김대중(DJ),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글쓰기를 회고한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를 펴냈다. 그런데 이 책은 지난해 말 최순실 비선 실세 파문을 계기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라 출간 3년 만에 10만 부를 넘겼다. 그와 17일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리더는 글을 쓸 줄 알아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보고 느낀 소감은….


“취임사를 읽어 보니 노무현 스타일이 짙게 배어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담백하고 소탈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연설을 좋아했다. 보통 취임사는 전직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보여 주려고 하는데,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더 앞세운 것 같다.”

―두 번째인 5·18 기념식 연설은 어땠나.

“본격적인 ‘문재인 스타일’이 시작된 듯했다.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았던 것은 (5.18 당시 구속됐던) 문 대통령이 제3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감정이입이 된 연설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문 대통령이 광주시민들에게 ‘당신들이 먼저 국민의 상처와 갈등을 품어 안고, 정의로운 국민 통합에 앞장서 달라’고 말한 것이다. 피해자인 광주시민들이 먼저 용서해 달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말이다. 통합이란 사실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리더로서 그걸 용기 있게 말한 것이 감동적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연설 스타일은 어떻게 다른가.


“문 대통령의 연설은 노 전 대통령보다 강렬함은 좀 빼고, 감성을 더했다. 5·18 기념사에서 희생자 네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유가족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사람이 먼저다’란 슬로건을 떠올리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살가운 말이나 행동은 체질적으로 쑥스러워했다. ‘악수하고 다닌다고 개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정책을 만들고,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DJ의 균형감, 노 전 대통령의 소탈함에 자신만의 감성을 더했다.”

강 전 비서관은 “DJ는 연설문 초안을 받으면 검은색, 빨간색 펜으로 빼곡하게 수정해서 보냈다. 너무 고칠 것이 많을 경우에는 아예 녹음을 해서 내려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설을 쓰면서 직접적인 DJ와의 대면은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아예 연설비서관은 비서동이 아닌 본관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는 “비서실장도 통하지 않고 노 전 대통령과 늘 독대하면서 글을 다듬었다”고 말했다.

―DJ와 노 전 대통령은 연설을 어떻게 준비했는가.

“DJ는 ‘국민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연설에 담았고, 노 전 대통령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방점을 두었다. DJ는 ‘지도자는 반 보만 앞서가야 한다’는 철학이 있는 분이다. 연설문을 만들기 전에 각 부처를 통해 늘 여론 수렴을 먼저 했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여론 수렴을 하지는 않았다. ‘리더는 어젠다를 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연설비서관을 불러 연설 내용을 직접 구술해 주었다. 이를 토대로 연설문 초안을 만들면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고 대통령과 함께 수차례 수정하는 작업을 벌였다.”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도 연설문 작업에 참여했는가.

“비서실장은 연설문이 다 완성된 후 독회 과정에야 참여했다. 독회에는 청와대 수석, 관련 장관들이 참여한다. 주로 ‘신문의 제목이 뭐라고 뽑힐 것인가’ ‘빠진 내용은 없나’ ‘사실관계 오류는 없나’ 정도를 점검한다.”

강 전 비서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 감옥이 아닌 하얼빈 감옥으로 잘못 쓴 오류는 정상적인 독회 절차를 거쳤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종 단계에서 부속실에서 수정돼 나오면 대통령이 손댄 것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최순실이 ‘대통령 연설문 고치는 게 취미’라는 말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다.

“대통령의 말은 권력 그 자체다. 대통령의 말에 손을 댔다는 것은 누군가가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보통 대통령 연설문을 쓸 때면 각 부처에서 수많은 민원이 들어온다. 제발 이 문구 한 줄만 연설문에 넣어 달라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면 기획예산처에서 예산도 따고, 뭐든 다 할 수 있다. 최순실의 연설문 고치기는 뽑히지 않은 권력이 국정을 농단한 증거였기 때문에 실망감이 더욱 컸다.”

“양정철은 전리품 잔치 막는 논개”


―문 대통령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인가.


“평생 변론문을 직접 써온 사람이다. 변호사들은 말과 글을 다루는 직업이다. 변론문을 누가 대신 써 줄 수도 없다. 문 대통령은 비서실장 때도 자기 글은 직접 꼼꼼히 고쳤다. 청와대에서 매년 대통령 연설문집을 내는데 비서실장의 인사말이 들어간다. 솔직히 비서실장의 인사말을 누가 읽겠는가. 그런데도 비서실에서 초안을 만들어 드리면 그대로 나가는 법이 없었다. 문 대통령은 아무리 사소한 글이라도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글은 앉아서 꼼꼼히 고쳤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란 말은 귀에 쏙 들어오는 명문이다. 이를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같은 식으로 썼다면 식상했을 것이다. 메시지는 간결해야 한다. 문장은 단문으로 쪼개야 한다. 꾸밈말은 줄여야 한다. ‘형용사는 명사의 적이다’(볼테르)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회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기억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사를 위해 구술해준 내용은 20∼30시간 분량이었다. 이를 15분 분량의 취임사로 만들어 내야 했다. 조기숙 전 홍보수석, 김호기 교수를 비롯해 6, 7명이 각기 다른 버전으로 취임사를 썼는데도 대통령에게 OK 사인이 나지 않았다. 결국 취임식 이틀을 앞두고 당선인 대변인이었던 이낙연 총리 후보자에게 취임사를 손보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취임사를 극찬하며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 이 후보자의 글에 대한 완벽주의는 전남도지사 시절 공무원들에게도 유명하다.”

―문 대통령 취임 후 열흘을 어떻게 보았나.


“참여정부의 아쉬웠던 점을 제대로 ‘복기(復棋)’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요즘 뉴스를 보면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 봐, 저렇게 하면 되잖아. 왜 그동안은 그렇게 안 했지? 그동안 국민이 불만을 갖고 있던 것들, 답답해했던 것들을 절묘하게 탁탁 건드려 준다. DJ는 항상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소탈함과 결기를 물려받았으면서도 DJ의 균형감도 갖춘 것 같다.”

―양정철 이호철 등 문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이 공직을 맡지 않고 떠난 이유는….

“단지 패권주의 우려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 전 비서관이 선거캠프에서 논공행상을 바라는 사람들을 논개처럼 모두 껴안고 들어가는 효과도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5년간 유력 주자였기 때문에 선거캠프 참여 인력이 매머드급이었다. 자칫 논공행상으로 전리품을 나눠주다가 다 망가진다. 그가 떠난 것은 함부로 숟가락 얹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다.”

“사이다 연설이 최선은 아냐”

―지난 대선 캠페인 때 가장 연설을 잘한 후보는 누구인가.


“누구나 심상정 후보를 꼽는다. 논리가 확실하고 메시지도 선명했다. 그러나 그분은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서 ‘사이다 발언’을 할 수 있었다. 홍준표 후보가 ‘코카콜라 발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진영만 보고 이야기했다. 문재인 후보는 상대 진영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애매하고, 답답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전략적 연설은 누구한테는 몇 점 따고, 누구에겐 몇 점 잃고 하는 것을 종합 계산해서 최적의 합의점을 찾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가 TV토론에서 추락한 이유는….

“의대 출신인 안 후보는 기업경영과 정계에 뛰어들면서 뒤늦게 인문학 공부도 많이 하고 토론도 많이 했다. 그러나 TV토론에서 결정적인 국면이 되니까 한계가 드러났다. 이과 출신의 한계로 보였다. 학습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 향후 극복하리라 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명연설가인가.

“트럼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은 매우 심플하다. 나와 내 편이 얻게 되는 이익만 강조하는 것이다. 이익 앞에서는 세계 평화니 동맹국도 필요 없다.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국정은 이익만 따지는 장사가 아니다. 현재의 실리를 위해 전 세계에서 존경받아 온 미국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장기적으로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대통령의 명연설이 나오지 않는가.

“서구에서는 별 내용이 없어도 박수쳐 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연설이 나오면 잘근잘근 씹어서 묵사발을 만든다. 명연설은 대통령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왜 유머감각이 없는가. 웃어줘야 유머를 한다. 좌우로 분열된 적대적인 분위기에서는 명연설도, 성공한 대통령도 나올 수 없다. 미래를 위해 대립의 정치에서 협치로 바뀌어야 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 대통령연설비서관 강원국#문재인 대통령#대통령 명연설#심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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