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대통령의 외로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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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 초반에는 점심·저녁식사를 희망하는 사람들로 미어터져 비서실이 교통정리를 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집권 4년 차가 넘어가면 이젠 대통령이 누구누구를 부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한산해진다. 그때 초청받아 오는 손님들도 입이 나와 있다고 한다. ‘잘나갈 땐 안 부르더니 이제야 불러….’ 김영삼 전 대통령도 정권 말 ‘저녁에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떠나버린 청와대 넓은 관저에 노부부만 남아 있으면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고 했다는 전언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대통령 주변을 도로에 비유했다. ‘집권 초기에는 마주 오는 차들만 보인다. 나를 봐 달라고 경적까지 울린다. 중반에 접어들면 오는 차도 있고 가는 차도 눈에 띈다. 임기 말이 되면 모두 떠나는 차들뿐이다. 행여 붙잡힐세라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 도망가는 차들도 적지 않다.’ 오죽했으면 노 전 대통령이 정권 말에 자신만 말하고 아무 토론이 없던 청와대 회의를 끝낸 뒤 이렇게 탄식했을까. “오늘도 원맨쇼 했네.”

▷비선 실세 최순실 씨의 단골 성형외과 의사였던 김영재 원장의 부인 박채윤 씨가 25일 법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굉장히 외로워했다”고 증언했다. 청와대를 드나들며 박 전 대통령의 개인적 고민 등을 나눴고 관저 침실에 들어가 대화도 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혼밥’을 먹는 이유에 대해 ‘부모님을 잃은 뒤 소화기관이 안 좋아 밥을 잘 못 먹는다’고 설명했다고도 한다. “국민 여러분이 가족이고 일하느라 외로울 틈이 없다”는 박 전 대통령의 말은 더없이 외롭다는 뜻으로 새겨들어야 했던 것 아닌가 싶다.

▷대통령도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독과 그로 인한 정서 불안은 국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대통령이 아무에게나 위로와 위안을 얻으려다가는 국정이 산으로 간다. 우리는 그 폐해를 여러 대통령에게서 보았다. 국가와 국민의 명운을 좌우할 결정을 내릴 대통령은 국정 능력 못지않게 정서적 안정감이 필수조건이다. 곧 새 대통령을 뽑을 유권자 모두 유의했으면 한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대통령#노무현#김병준#최순실#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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