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포기하는 것도 용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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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가장 우울한 세대’ 대한민국 청춘은 고달프다
취업절벽 시대 스트레스에 남들 의식한 심리적 압박감
‘경로변경’과 ‘경로이탈’은 달라… 문과 준비하다 무과로 진로수정
‘청년 이순신’ 역사를 바꿨다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큰 결정이지만, 인생에서 하나의 통과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새 꿈과 목표를 찾아 나가겠다.” 최근 피겨스케이팅 선수 아사다 마오가 전격 은퇴를 선언했을 때 일본 사회는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로 화답했다. 27세 동갑내기 김연아의 벽을 넘지 못한 그는 ‘운명의 라이벌’ 은퇴 후에도 분투했으나 무릎 부상으로 고전했다. 그런 가운데 나온 ‘중도 포기’를 패배자의 변으로 듣지 않고 응원하는 모습은 한국인으로서 인상적이었다. 치열하게 노력했다면 무작정 전진만이 미덕은 아니다. 22년 피겨 인생을 접고 ‘인생 2라운드’에 뛰어든 청춘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내와 끈기에 대한 신앙으로 인생 옵션에서 ‘포기’란 단어를 지울 필요는 없다.

어떤 일을 끝까지 계속하는 에너지와 의지 결핍에서 비롯된 ‘습관적 포기’를 부추기거나 ‘충동적 포기’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포기와 끈기 중 선택의 자유는 허(許)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포기하지 말라”는, 귀에 못 박히게 들었던 성공 공식의 굴레에 갇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심리적 압박감 속에 사는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목표에 대한 ‘포기할 권리’를 포기할 때 생기는 가슴앓이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청춘이 제일 고달프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51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대 청년이 가장 우울한 세대로 꼽혔다. 취업 스트레스와 상대적 박탈감이 배어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 시대에 보기 드문 화려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가 남루해진 모습이 안쓰럽다.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선택에 관대해야 하는데 ‘경로 변경’을 ‘경로 이탈’이라 경계한다.



요즘은 고학력도 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1분기 대졸 실업자가 고졸 실업자를 추월해 사상 처음 50만 명을 넘어섰다. “한국에선 대학 나왔다는 체면이 취업 선택의 굴레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일본 대학교수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넘치는 대졸자는 취준생이란 이름으로 잉여인간처럼 떠돈다. 번듯한 일자리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 틈새에서 ‘공시족’만 늘었다. 지난해 공시생은 25만7000명으로 5년 전보다 39%가 증가했다. 대학 안 가고도 동사무소 등지에 9급 공무원으로 들어가던 때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다. 그 많은 ‘공시생’이 자유의지로 버티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것이 이 땅의 청년들에게 꿈의 직장이라면 이 나라의 꿈은 무엇인가.

포기는 변화다. 방향 선회다. 그래서 ‘포기의 기술’을 다룬 책 ‘더 소중한 삶을 위해 지금 멈춰야 할 것들’에서는 끈기가 과연 능동적인 행위인지 묻는다. 자기 신뢰 없이는 변화보다 현실의 익숙한 고통이 속 편하다. 불필요한 노력과 불가능한 목표 앞에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새로운 꿈을 위한 위험 감수, 그게 청춘의 용기다. 그런 선택으로 나라를 구한 위대한 한국인이 있다. 곧 탄신일이 다가오는 이순신 장군이다.

알다시피 이순신은 초년에 문과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스무 살에 결혼해 무과로 진로 수정한 데는 무과 출신 장인 영향 등도 있겠으나 본인의 고민도 깊었을 터다. 무과로 전향하고도 첫 시험에 떨어졌고 다시 도전해 32세에 합격했다. 문과 과거를 포기한 그의 결단은 세계 해전사의 신화로 이어졌다. 돌아보면 인생사에 쓸모없는 것이란 없다. ‘난중일기’ 등에서 보여준 인문학적 소양과 탁월한 글솜씨가 문과를 준비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충무공을 떠받들고 추종하긴 쉬워도 포기와 끈기를 적절하게 조율한 ‘청년 이순신’의 길을 본받기란 쉽지 않다.

기성세대가 구축한 ‘포기 금지’ 프레임에 갇힐 필요 없다. 포기하면 안 될 때도, 멈춰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 몫이다. 그걸 배울 데가 드물다는 것은 척박한 풍토와 관계된다. 잘못된 포기와 잘된 포기를 축적하면서 더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미련한 미련은 청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새로운 꿈을 꾸는 한, 포기란 패배와 동의어가 아니다.

일찍 피는 꽃이 있고 더디 피는 꽃이 있다. 다들 봄꽃인데, 3월에 핀다고 우쭐하지 않고, 5월에 핀다고 푸념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 그리고 또, 봄이 계절의 전부도 아니라는 사실. 그 불변의 진리가 오늘도 우리 눈앞에 진행 중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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