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문병기]자녀와 보기 민망한 ‘19禁 토론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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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흥분제 등 정제안된 표현 난무
인신공격도 도넘어… 품격 갖춰야

문병기·정치부
문병기·정치부
‘돼지흥분제, 강간 미수, 성폭력….’

23일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개최한 첫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선 성인물이나 피의자 신문조서에 나옴 직한 ‘낯 뜨거운 말’들이 쏟아졌다.

이날 TV토론회가 ‘19금’으로 변질되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겨냥해 “여성 폭력범죄를 공모한 후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홍 후보는) 돼지흥분제로 강간미수의 공범이다. 이는 인권 문제이고, 국가 지도자의 품격 문제”라고 적나라한 단어들을 쏟아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도 “자서전에 나온 성폭력 모의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들었다.

‘성(性)적 용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며 쏟아낸 인신공격과 말꼬리 잡기도 다반사였다. ‘거짓말 후보’ ‘조잡스럽다’ 등의 말들이 여과 없이 전파를 탔다. 19일 KBS 초청 토론회에서도 ‘바지 사장’ ‘나이롱맨’ 등 상대를 비하하는 말들이 난무했다.

시민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 누리꾼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돼지흥분제, 강간을 운운하다니…. 아이들과 함께 보다 민망해서 채널을 돌렸다”고 적었다.

치열한 토론장에서 거친 공방은 오갈 수 있다. 하지만 같은 표현이라도 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대선 후보들이 상대를 자극하려고 경쟁하듯 저속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정치 혐오’만 부추길 뿐이다.

더욱이 첫 법정 TV토론회가 네거티브 공방으로 치달으면서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국정 철학, 정책의 청사진을 점검할 소중한 기회를 날려 버렸다. 외교안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단 한 번 나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문제, 한일 위안부 합의 논란 등 주요 이슈는 토론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유권자가 보고 싶은 건 말의 제압이 아니라 논리의 제압이며 말의 여유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토론회#대선#돼지흥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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