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美軍도 세배 다니는 DMZ의 훈훈한 명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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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우리에게 설날은?]새로운 설
[2016년 설을 맞는 한국인의 표정]

“장은 낮에 문산에서 봤지. 그거 알아? 거리로 따지면 여기서 문산 가는 거랑 개성 가는 거랑 같아.”

4일 오후 경기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만난 김태유 씨(72)의 말을 듣고서야 실감이 났다. 이곳에서 북한의 ‘기정동 마을’까지는 불과 1.8km. 마을회관 2층에만 올라가도 북녘 땅이 훤히 보였다. 김 씨는 “전쟁 나기 전 어렸을 땐 개성도 다 우리 생활권이었다”며 미소 지었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민간인 거주지역인 대성동 마을의 분위기는 삼엄하다. 주민들조차 출입카드가 없으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다. 0시부터 오전 5시까지 ‘통금시간’도 있다. 1953년 6·25전쟁 정전협정에 따라 DMZ 안에 만들어졌다. 현재 47가구 202명이 살고 있다.

100m 높이의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이 서 있다. 이곳은 유엔군사령관의 관할 아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도 명절이 다가오면 들뜨기 시작한다. 수십 년 전 만들어져 제대로 된 수리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작고 낡은 집들이지만 외지에서 식구들이 꾸역꾸역 들어오면 정겹기 그지없다. 주민들 역시 분주해진다. 논과 밭, 초등학교와 마을회관, 체육관 외에는 아무 시설도 없는 마을에서, 주민들은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차를 끌고 20km가량 떨어진 문산의 5일장을 찾는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경비를 서던 유엔군사령부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 소속 미군들도 마을의 터줏대감인 최고령 어르신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린다. 설날만큼은 싹싹한 ‘군인청년’ 혹은 ‘군인양반’이 되는 것이다. 불안과 평화가 묘하게 공존하는 이곳에서 주민들은 북녘 동포와 함께 설맞이를 할 ‘그날’을 그리고 있었다.


▼ 사할린 귀국 동포 ‘고향 노래’에 어깨춤 덩실 ▼

대성동의 새해 소망은 63년째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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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오후 대한민국 최북단 민간인 거주지인 경기 파주시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바라본 북한 땅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대성동초등학교 졸업식이 열린 이날도 군인들은 학교 앞을 굳게 지켰다. 오른쪽 하늘 멀리 보이는 높이 160m의 
게양대(점선 원 안)에는 북한 기정동 마을에서 내건 인공기가 걸려 있다. 파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4 일 오후 대한민국 최북단 민간인 거주지인 경기 파주시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바라본 북한 땅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대성동초등학교 졸업식이 열린 이날도 군인들은 학교 앞을 굳게 지켰다. 오른쪽 하늘 멀리 보이는 높이 160m의 게양대(점선 원 안)에는 북한 기정동 마을에서 내건 인공기가 걸려 있다. 파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대성동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수십 년째 얼굴을 맞대고 살다 보니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다.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나면 다른 집에 세배를 드리러 가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40, 50대 ‘청년’들이 아이들에게 설빔을 입혀 어르신들의 집으로 세배를 다닌다. 김동구 이장(48)은 “미군들이 세배를 다니는 것도 한국의 정서를 체험하려는 뜻이다”고 말했다.

명절 직전 동네 부녀회와 주민자치위원회가 어르신들과 나들이에 나서는 것도 대성동 마을의 오랜 전통이다. 파주 시내로 나가 식사를 대접하고 TV 말고는 볼거리가 없는 어르신들을 위해 오랜만에 영화 구경도 시켜드린다.

매년 비슷한 설이었지만 올해 주민들의 감회는 평소와 다르다. 정부가 대성동 마을을 ‘통일 첫 마을’로 지정해 본격적인 ‘새 단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곳의 주택들은 대부분 1980년대 지어지거나 개량된 뒤 사실상 보수공사를 하지 못한 채 낡아왔다. 집마다 벽에 금이 가고 겨울에는 난방도 잘되지 않아 주민들은 스티로폼을 덧대 단열재로 쓰기도 한다. “공화당(마을회관) 있지, 공화당. 그건 이승만 대통령 때 만든 거야. 정말 오래된 건물이라고.” 김태유 씨가 마을회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봄이 되면 마을 주택과 상하수도 등의 정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군내면 주민자치위원장인 김인근 씨(63·여)는 “우리 집은 3월에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라며 “올해 추석은 새집에서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기뻐했다.

그래도 여전히 대성동 마을 주민들의 첫 번째 새해 소망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평화’다.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애청자라는 김태유 씨는 “이젠 정말 ‘어서 만나러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김인근 씨는 “북한에서 매일 내보내는 대남방송도 시끄럽고 아직도 ‘언제 와서 잡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다”며 “새해에도 남북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호소했다. 김 이장은 “그래도 명절인데 같은 동포끼리 설을 함께 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소망을 밝혔다.

고향 가락에 어깨춤… 사할린 동포의 미소

4일 오전 인천 연수구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열린 ‘사할린 동포와 함께하는 설맞이 행사’에서 할머니들이 노래에 맞춰 흥겹게 
춤추고 있다. 이곳에는 대한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 81명이 생활하고 있다. 인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4일 오전 인천 연수구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열린 ‘사할린 동포와 함께하는 설맞이 행사’에서 할머니들이 노래에 맞춰 흥겹게 춤추고 있다. 이곳에는 대한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 81명이 생활하고 있다. 인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4일 오전 인천 연수구의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은 연분홍, 연노랑 한복으로 가득했다. 미리 맞는 설 잔치가 열린 이곳에서 사할린 동포 수십 명이 노래에 맞춰 어깨춤을 췄다. 김상유 전 복지관장(62)은 “오랜만에 왔는데 너무 곱게 단장하셔서 알아보기 힘들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곳 복지관에 머무는 사할린 동포는 91명. 모두 말년에 영주귀국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전국적으로 이런 사할린 동포들의 거처는 26곳에 이른다.

잔치 분위기로 들뜬 복지관 한가운데 짙은 푸른색의 카디건을 입고 조용히 박수를 치는 할머니가 있었다. 김금옥 할머니(88). 사할린에서 태어난 그는 지난해 12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영주귀국해 생애 처음으로 고국에서 설을 맞는다.

“좋수다. 만족합니다.” 짧게 소감을 말한 뒤 김 할머니는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주한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줄곧 사할린에서 살았다.

김 할머니는 “사할린이 너무 작아 손자들은 대륙에 정착해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하바롭스크에 정착한 손자가 그를 모시려 했지만 불편한 마음에 고국행을 선택했다. “여기서는 일 안 해도 밥 주고, 손자들도 편하고, 얘기할 사람도 많아 좋아요.”

김 할머니의 남편은 탄광 노동자로 사할린에 강제징용 됐다. “탄광일이 감옥살이나 같았는데 해방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장가도 왔죠. 그런데 오래 못 살았어….” 김 할머니가 43세일 때 남편은 아들 셋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김 할머니는 텃밭에 꽃과 채소를 심어 돈을 벌었다. “꽃 장사해서 아이들 대학도 다 보냈지. 고생 정말 많이 했어요. 그래도 보람은 있죠.”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고향으로 가는 배∼ 꿈을 실은 작은 배∼ 정을 잃은 사람아 고향으로 갑시다.”

복지관 직원이 나훈아의 ‘고향으로 가는 배’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흐뭇한 표정으로 구경하던 김 할머니 곁에 한 부부가 다가섰다. 사할린 홀름스크에서 동네 이웃으로 지낸 동포 강영희 씨(69·여)와 그의 남편이다. 김 할머니가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자 강 씨가 말했다. “큰아드님이랑 친하게 지낸 우리 남편이에요.” 큰아들이라는 말에 할머니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할머니의 첫째, 셋째아들은 예순을 넘기지 못한 채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강 씨가 설명했다. 그러고는 김 할머니를 다독였다. 오전에 만든 만두로 점심 식사를 하는 사이, 보드카가 한두 잔씩 오갔다. 스마트폰에 저장한 손주들의 사진을 서로 자랑하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 4만3000명의 한인이 사할린에 남았다. 현재 남은 1세대 한인은 700여 명에 불과하다. 적십자사 관계자는 “동포들을 위한 영주귀국 지원은 물론이고 역방문, 일시 모국방문 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잔치가 벌어지는 내내 김 할머니는 연보랏빛 꽃이 그려진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노래 부르는 직원을 보며 “우리 아들도 노래 잘했어”라며 흥겨워했다. 김 할머니와 강 씨는 서로 손을 잡고 “아주머니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여기가 훨씬 좋아요. 잘 왔어요”라며 얼싸안았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 김 할머니의 미소가 따뜻했다.

명절 때 고향 생각은 만국 공통

중국 출신의 주부 쑤잉 씨가 3일 부산 해운대구 좌동 전통시장의 한 가게에서 설 차례상에 올릴 생선을 고르자 가게 주인이 그릇에 생선을 담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쑤 씨는 올해 한국에서 일곱 번째 설을 맞는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중국 출신의 주부 쑤잉 씨가 3일 부산 해운대구 좌동 전통시장의 한 가게에서 설 차례상에 올릴 생선을 고르자 가게 주인이 그릇에 생선을 담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쑤 씨는 올해 한국에서 일곱 번째 설을 맞는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명절이 다가오면 외국인 이주민 역시 짙은 향수에 젖어든다.

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좌동 전통시장에서 만난 중국인 쑤잉(蘇穎·30) 씨. 그는 “아직도 설이 다가오면 긴장이 된다. 주부가 할 일이 가장 많지 않냐”며 설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부지런히 고르고 있었다.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자란 그는 어느덧 아이 둘을 둔 7년 차 주부. 2009년 12월 1년간 알고 지내던 한국인 남편(39)과 결혼하면서 ‘부산 아지매’가 됐다.

쑤 씨는 과일, 나물, 생선가게를 차례로 들러 물건을 살폈다. 꼼꼼하게 가격을 물으면서도 정작 물건을 사진 않았다. “설이라 장을 크게(많이) 봐야 하기 때문에 일단 물가가 어떤지 미리 둘러보러 온 거예요.”

알뜰함만 보면 한국 아줌마가 다 된 것 같지만 쑤 씨는 아직도 한국의 설이 낯설고 어렵다. 고향의 춘제(春節)와 시기도 같고 음식을 준비해 가족 친지와 나눠 먹는 풍습도 닮았지만 분위기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액운을 쫓기 위해 집마다 터뜨리는 폭죽 때문에 시끌벅적하고 친지나 이웃을 방문하느라 들뜬 춘제와 달리, 한국의 설은 너무 조용한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음식 준비도 만만찮은 일이다. 차례상에 올릴 음식이 워낙 많다보니 주방에서 시어머니 보조 역할을 하는 쑤 씨 역시 힘에 부친다. 게다가 두 시누이의 가족이 모이면 끼니마다 10명의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그는 “춘제는 쉬는 날이 길어서 온 가족이 3, 4일 여유 있게 음식을 준비한다”며 “한국에서는 연휴가 짧아 부담이 크다”고 했다.

우리가 설에 떡국을 먹는 것처럼 중국인들은 춘제에 꼭 만두를 먹는다. 그는 “대추 두부 땅콩 등 만두피 속에 넣는 다양한 재료마다 복을 비는 의미가 달라서 먹는 재미도 크다”며 “동전을 넣은 만두를 고른 사람에겐 올해 재물 운이 넘칠 것이라며 축하해주는 등 식사 내내 대화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명절 준비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정한 시댁 식구의 도움과 격려가 큰 힘이 된다. 쑤 씨는 “차례상 차리는 법 등 한국 문화를 잘 몰라 허둥댈 때마다 어머니께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셔서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새 옷과 세뱃돈, 맛있는 음식에 웃음꽃이 피는 아이들을 보면 힘든 것도 고향에 대한 향수도 싹 잊는다”며 활짝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한국에서 일곱 번째 설을 맞는 네팔 출신의 우샤 가우텀 씨(35)는 명절 때 깊어지는 향수를 동포들에 대한 봉사로 달래고 있다. 우샤 씨는 2004년 카트만두에 선교사로 온 인도 출신 바쿨 다이마리 씨(45)와 결혼했다. 이어 광주신학대 석사과정에 입학한 남편을 따라 2009년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낯선 한국생활 탓에 카트만두에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힌 적도 많다. 그러나 서툰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딸(12·초등학교 5학년)과 함께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를 다니며 조금씩 나아졌다.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한 그는 학교생활 1년 만에 능숙한 한국말을 구사하게 됐다.

우샤 씨는 2010년 광주에 있는 네팔 출신 근로자 400여 명과 이주여성 50여 명을 위해 통역 봉사를 시작했다. 몸이 아픈 동포들과 함께 직접 병원에 가 한국 의사들에게 ‘아픈 증세’를 설명했다. 임금체불 등 법적 분쟁 등을 겪을 때도 통역은 물론이고 모든 과정을 챙겼다. 네팔 동포들 사이에 ‘똑순이’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광주 광산구 평동주민센터 옆 건물에 있는 네팔인센터에 머물고 있다. 설 연휴 때인 7일에는 남편이 있는 광산구 네팔인교회에서 동포들과 조촐한 잔치를 열고 치킨카레와 콩죽을 함께 만들어 먹으며 고향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다. 우샤 씨는 “집에서는 네팔 풍습에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지만 동포들과 함께 식사할 때는 숟가락을 사용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인천=김민 kimmin@donga.com /부산=강성명 /광주=이형주 기자
파주=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명절#자유의마을#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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