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걸린 투표일에도 해변 북적… “이런게 그리스 스타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그리스 구제금융案 국민투표]국민투표 현장 르포

전승훈 특파원
전승훈 특파원
“애국심을 원한다면 반대!” “경제를 위한다면 찬성!”

5일 오전 7시(현지 시간)부터 그리스와 유로존의 운명을 결정할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아테네 중심가 오모니아 지하철역 부근의 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 앞에서는 이날 새벽부터 붉은색 ‘반대’ 깃발과 푸른색 ‘찬성’ 깃발을 든 운동원들이 나와 박수를 치고 구호를 외치며 찬반 투표를 독려했다.

이날 선거에서 ‘반대’ 표를 행사한 람브로스 씨(45·전직 선원)는 “채권단의 협상안에 찬성해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는다면 부채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독일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경제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원한다”고 말했다.

반면 부유층이 밀집해 있는 해변가 글리파다 지역의 투표소에서 ‘찬성’을 찍고 나왔다는 파노스 파라테오도루 씨(46·의사)는 “만일 반대표가 많아 ECB가 긴급유동성 자금을 끊는다면 월요일에 그리스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텅 비게 될 것”이라며 “협상에 실패하고 국가부도를 낸 알렉시스 치프라스 정권은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주말 그리스는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시민들은 대부분 근교의 해변에 가서 가족끼리 수영을 즐겼다.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를 맞은 나라의 침울함은 사라진 것처럼 비쳤다. 에르무 거리 커피숍에서 만난 파멜라 랑가스 씨(35)는 “이것이 그리스 스타일(Greek Style)”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식당과 상점에서는 아직까지는 신용카드가 통용됐다. 그리스 전통 수블라키(꼬치구이) 음식점의 종업원 제냐 씨는 “지금까지는 카드도 받는데 다음 주에도 은행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상의 뒤쪽에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분노, 분열이 섞인 묘한 감정이 광장과 카페 골목, 시장 구석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찬성파나 반대파를 막론하고 국민투표 이후가 더 불안하다는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지금은 하루 60유로만 ATM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번 주 월요일부터 ATM에 돈이 떨어지고 키프로스처럼 은행 예금도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스 은행들은 8000유로(약 1000만 원) 이상의 예금자에게 최소 30%의 손해를 부담시키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서방 언론이 보도한 이후부터 그랬다. 이날 투표 직전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그리스 유권자들이 구제금융안을 거부하면 신규 자금을 수혈받지 못해 의료 시스템이 붕괴하고, 전력 공급과 생필품 수입이 끊기는 ‘아마겟돈’ 같은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막판 표심은 세대별, 소득별로 양극화가 심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젊은층과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반대’ 의견이, 노인층과 부유층에선 여전히 ‘찬성’이 우세했다.

특히 실업률이 49.7%에 이르는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의견이 ‘노’였다. 대학 강사인 카심프라스 씨(35)는 “테러와 같은 현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를 찍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시내 그리스국립은행 앞에서 연금을 인출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파노스 씨(66)는 “유로존에서 이탈하면 반쪽으로 줄어든 연금마저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내 생전에 나라가 이렇게 결딴난 모습을 보게 되니 정말 슬프다”고 말했다.

아테네 거리에는 독일 재무장관 볼프강 쇼이블레의 사진과 함께 ‘그는 5년 동안 당신의 피를 빨아왔다’라는 글귀가 들어간 포스터가 나붙었다. ‘예스’ 포스터는 뜯겨 나뒹굴거나 스프레이로 ‘노’라는 글자로 덧칠되기도 했다.

국민에게 선택을 강요한 치프라스 총리는 갈등과 반목을 부추기는 인물로 보였다. 남편과 부인, 형제와 자매, 친구와 이웃,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도 ‘찬반 토론’을 하다가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아졌다. 대학생 파파도 풀로스 씨(20)는 “온라인에서도 ‘애국자’ ‘배신자’ ‘이성을 잃은 좌파’ 같은 험악한 말을 주고받으며 거센 찬반 논쟁을 벌인 후에는 페이스북에서 ‘친구 끊기’ 행렬이 대규모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양고기를 갈고리에 매다는 작업을 하던 정육점 주인 테세오풀리스 씨(56)는 “치프라스 정권이 취임한 후 5개월간 매상이 40%나 줄었다”고 말했다.

한편 언론사들이 투표 하루 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찬성과 반대는 각각 44%와 43%, 43%와 42.5% 등 1%포인트 안팎의 차로 접전을 벌였다.

▼ 출구조사 “반대 우세” ▼

오차범위내… 섣불리 예측 못해


5일 치러진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구제금융안 거부)가 찬성(구제금융안 수용)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지 여론조사기관 GPO가 발표한 오후 6시 투표 마감 직후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반대가 51.5%, 찬성이 48.5%로 나타났다. 하지만 오차범위 이내 결과여서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아테네=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그리스 구제금융#그리스#그리스 국민투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