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고전 통한 현실 비판, 그러나 따뜻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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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신영복 지음/428쪽·1만8000원·돌베개

지난겨울 신영복 교수가 성공회대에서 강의하는 모습. ‘담론’은 그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돌베개 제공
지난겨울 신영복 교수가 성공회대에서 강의하는 모습. ‘담론’은 그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돌베개 제공
키도 크고 미남인 로펌 변호사가 있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아침마다 출근한다. 그의 차를 운전하는 운전기사도 젊은 미남이다. 그런데 그 변호사의 부인은 남편만큼 근사하지 않다. 키도 크지 않고 미인형도 아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얼마 후 들리는 소문. ‘부인 친정이 굉장히 부자인가 보다.’ 실은 부부가 운명적인 사랑을 했을 수도 있고, 부인의 성품이 소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인간성’은 비어 있고 화폐 가치로만 사람을 본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궁금한 건 직업, 직위, 수입, 재산 같은 거다. “인간의 정체성이 소멸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우리가 갇혀 있는 ‘상품문맥’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강의다. 지난겨울로 대학 강의를 매듭지어 강단에서 신 교수를 만나기는 어렵지만 “그 미안함을 책으로 대신한다”고 밝혔다.

‘담론’은 신 교수의 강의를 녹취한 원고가 바탕이 됐다. 2004년 출간한 ‘강의’의 동양고전 독법을 잇되 고전을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을 던졌다. 왜 21세기에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신 교수의 답인 셈이다.

가령 ‘논어’ 화동(和同)담론의 화(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인 반면에 동(同)은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다. 오늘날 강대국의 패권적 구조는 동(同)의 논리로 조명된다. 신 교수는 20세기 고난의 역사를 거쳐 온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21세기에는 화(和)에서 화(化)로 가는 ‘화화(和化)’ 패러다임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맹자’ 강의에는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신 교수의 철학이 담겨 있다. 강연자는 전국시대 제나라의 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그 소가 불쌍하다며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는 ‘곡속장’의 일화를 소개한다. 소는 봤지만 양은 못 봐서다. 본다는 것에는 그 대상을 보고, 만나고, 안다는 ‘관계’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유해 식품이 만들어지는 건 식품을 만든 사람이 그 식품을 먹을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에 소개되지 않은 또 다른 일화. 강연자는 한동안 층간소음에 시달렸단다. 어느 날 집 앞 놀이터에서 윗집 사는 사내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뭘 좋아하느냐, 커서 뭐가 되고 싶냐 두런두런 얘길 나눴단다. 그 뒤로는 윗집에서 아이가 뛰어다녀도 괴롭기는커녕 얘기를 나누던 아이 얼굴이 떠올라 웃음 짓게 되더란다. 보았고, 만났고, 관계를 맺은 이야기다.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래디컬함’이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신 교수가 들려주는 강의는 편안하게 읽히다가도 뜨끔하게 하는, ‘매섭게 둥근’ 담론이다.

유명한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뒷얘기도 반갑다. 당시의 글이 징역살이의 고달픔 없이 반듯하게 보였던 것은 실은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을 위해서였고 검열을 거치는 편지였기 때문이다. 혹독한 감옥 생활 중에도 자살하지 않았던 것은 하루 2시간 쬐는 햇볕을 통해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의 절정을 느껴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소중히 여기는 강연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부분들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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