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물 대신 책 이번엔 ‘북 버킷’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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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버킷 이어 ‘내 인생의 책 10권 소개’ SNS 열풍
8월 美-英서 시작 각국으로 번져… 해리포터-앵무새 죽이기 최다 언급
국내선 대하소설 토지-태백산맥… 자본론 등 서양고전 서적 선호

24일 밤 12시. 서재에 꽂힌 책들을 훑어봤다. 2시간이 훌쩍 지났다. 회사원 이정미(가명·36) 씨는 최근 페이스북 지인으로부터 ‘나에게 영향을 줬던 책 10권 소개하기’의 다음 주자로 지명받았지만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씨는 서가에 꽂힌 책을 하나씩 빼서 검토해 신중하게 10권을 고른 뒤 이유를 정리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댈러웨이 부인’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한시 미학 산책’ 등이 이 씨가 뽑은 책이다. 이 씨는 “요즘 읽은 책보다는 고교, 대학 등 성장기에 읽었던 책”이라며 “남들이 보는 만큼 신경이 많이 쓰였다”고 말했다.

○ 아이스 버킷에 이은 북 버킷?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책 소개하기’가 유행이다. 일명 ‘북 버킷’이다. 페이스북에 간단한 이유와 함께 ‘내 인생의 책’ 10권을 고른 뒤 이 놀이를 이어갈 사람을 2, 3명 지목한다. 루게릭 병 환자를 위한 얼음물 뒤집어쓰기 릴레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와 유사하다.

지난달부터 미국, 영국 등에서 시작해 큰 인기를 끌자 페이스북은 게시글 13만 건에 언급된 ‘10권의 책’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책은 해리포터 시리즈(21.1%)였다. 이어 ‘앵무새 죽이기’(14.5%), ‘반지의 제왕’(13.9%), ‘호빗’(7.5%) 순이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대중적인 인기를 끈 문학 작품들이다.

본보 취재팀은 국내 페이스북 이용자 30명의 ‘북 버킷’ 리스트를 분석했다. 대체로 인문철학서적이나 고전 등 묵직한 책이 많았다. 소설의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보다 ‘토지’ ‘태백산맥’ 등 대하소설이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서양고전을 선호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같은 인문 철학서도 눈에 띄었다.

○ 지명받아도 고민, 안 받아도 고민

‘북 버킷’은 지명을 받아도, 혹은 받지 못해도 스트레스다. 회사원 박재헌 씨(39)는 “페이스북을 함께 하는 친구가 나를 빼고 다른 사람들을 지목했다”며 “‘내가 무식해 보이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북 버킷’ 취지를 알리는 서두에는 “너무 오래,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라”고 적혀 있지만 책 리스트는 자신의 지적 수준이나 취향을 보여주기에 며칠씩 고민하기도 한다.

회사원 김정희(가명·30) 씨는 “평소 하루키 책을 좋아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릴 때는 어렵고 뭔가 ‘있어 보이는’ 책 위주로 골랐다”며 “북 버킷이 지식의 공유화를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지식 과시 욕구도 뺄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미화 독서평론가는 “영미권은 자기중심적인 반면 한국은 남의 시선을 중시하기 때문에 있어 보이는 책을 고르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책을 고르면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됐다는 사람들도 많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생의 책’을 고르다 보면 자연스레 나를 되돌아보고, 자신을 추스르며 살아갈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윤종 zozo@donga.com·박훈상 기자
#아이스 버킷#북 버킷#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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