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동서 피워낸 희망의 꽃송이… 투병 최승자 시인 새 시집 ‘물 위에 씌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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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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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시작 제공
천년의 시작 제공
최승자 시인(59·사진)이 신작 ‘물 위에 씌어진’(천년의시작)을 냈다. 하지만 출간기념회도, 독자와의 행사도 예정돼 있지 않다. 경북 포항시의 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시인은 1월 경기 이천시 성안드레아신경정신병원으로 옮겨 투병 중이다.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을 빼고는 면담조차 불가능하다.

시집이 나온 뒤 최 시인은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왔다. “책이 나왔다면서요. 웬만하면 고마운 분들을 뵙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여건이 그렇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공중전화의 동전이 떨어지며 ‘쨍강’ 소리를 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모두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졌다. 극심한 불면증,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갑자기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고통 속에서도 시인은 펜을 놓지 않았다. 노트에 검은색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시 60편이 모이자 출판사에 우편으로 원고를 보냈다. 키 149cm, 몸무게 34kg의 시인이 온몸의 기력을 모아 짜낸 글들이다.

‘꿈인지 생시인지/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꿈인지 생시인지/나도 베란다에서/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시 ‘물 위에 씌어진 3’에서)

1980, 90년대 ‘스타 시인’이었던 그는 90년대 후반 정신이 쇠약해지며 병마에 시달렸다. 한동안 시집을 내지 못했고 소주와 줄담배에 의탁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 그는 11년 만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냈고 그해 등단 31년 만에 자신의 첫 문학상이 된 지리산문학상에 이어 대산문학상도 받았다.

지난해 겨울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끝나고 포항으로 내려가는 시인을 배웅한 문학평론가 황현산 씨는 시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슬며시 거둬들였다.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 같아 힘주어 붙잡을 수 없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인 것만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머지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했다.”

병동에서 피어났지만 시는 1980년대 독기어린 시어보다 한결 부드럽고 명료해졌다. 그리고 희망을 얘기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을 말한다/뒤에서 우리의 존재를 든든히 받쳐주는 그림자인 것 마냥/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환각제인 것 마냥/…/잊어라 잊어라/죽음의 문명을//어느 날 구름 한 점씩/새로이 피어나는 날들을 위하여.’(시 ‘20세기의 무덤 앞에’에서)

시인은 지난해 상을 받은 뒤 지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제 투병 사실이 알려져 많은 관심도 받았지요.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시인이라 보답할 것이 시밖에 없네요.”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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