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문명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단어 ‘블랙리스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8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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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어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구속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문화예술계 일각에 대해 지원 배제를 주도한 행위를 명백한 직권남용으로 판단한 것이다. 함께 기소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 등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회적 논란이 제기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관련 인사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 합의30부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검열을 금지하는 헌법에 위배될 뿐 아니라 예술 지원의 공정성에 대한 문화계와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 것으로 그 피해 정도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고 판시했다. 실제로 특검 및 감사원에 따르면 블랙리스트 대상은 8000여 진보좌파성향 문화예술인과 3000여 단체에 이른다. 예전에도 문화예술부문 예산을 정권 코드에 맞는 인사들에게 집중 지원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이번 사건은 그 규모와 행태가 남달랐다.

독재정권에서나 있었을 법한 사상 통제와 특정 단체 문화인에 대한 조직적 배제를 지시한 인물은 김기춘 전 실장이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2014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좌파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문체부 예산이 지원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블랙리스트라는 공안적 사고와 구시대적 흑백논리에 갇힌 방식으로 구현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 김 전 실장이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실정법을 어겼으면 ‘블랙리스트 울타리’에 가둘 게 아니라 적법하게 처리했어야 마땅했다. 지원 배제 명단에 권력에 밉보인 사람까지 포함되는 등 기준도 자의적이었다.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가꾸는 창작 활동은 다양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에서 꽃피운다. 그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 하는 이유다. 이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곧 창작활동에 대한 사형선고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이참에 정부의 문화예술계 지원 절차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도록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좌파든 우파든 정권에 관계없이 이 땅에서 문화예술의 숲이 울창해지려면 어떤 명분으로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옥죄거나 침해하는 일이 사라져야 한다. ‘블랙리스트’란 야만적 단어는 문명사회의 수치다. 새 정부도 정권과 이념과 성향이 다른 문화예술인이 소외되거나 외면당하지 않도록 이번 재판의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김기춘 실형#조윤선 무죄#좌파 문화예술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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