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의 재발견]〈55〉‘ㄹ’ 발음 빠져도 머릿속엔 ‘닭’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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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맞춤법은 우리가 소리 내는 원리와 긴밀히 연관된다. 맞춤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신이 일상에서 어떻게 소리 내는지를 확인하고 쓰는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왜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하는가. 발음의 이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비교적 쉬운 맞춤법인 ‘닭, 흙’을 보자. 이 단어들의 표기 원리는 쉽다. 이유를 묻는 것조차 조금 민망하다.

닭이[달기], 닭을[달글], 닭은[달근]

우리의 발음이 이 단어를 ‘닥(×)’이 아닌 ‘닭’으로 적도록 안내한다. 두 번째 음절의 ‘ㄱ’은 앞말의 받침이다. 우리 머릿속 사전에 /닭/으로 실렸고 우리는 거기에 입각해 소리를 낸다. 그런데 그렇게 만만하기만 할까? 문장에 넣어 일상의 속도로 발음해 보자.

올해 먹은 닭이 백 마리는 된다.
너는 매일 닭을 먹느냐?
닭은 살찌지 않아요.


혹시 [다근(×), 다글(×), 다근(×)]이라고 소리 내지는 않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가 그렇게 소리 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좀 더 들어가자. 아래 문장의 밑줄 친 부분을 발음해 보자.

올해 먹은 통닭이 백 마리는 된다.
너는 매일 통닭을 먹느냐?
통닭은 살찌지 않아요.


[통달기, 통달글, 통달근]이라고 발음하는가? 정말 그렇다면 표준 발음법을 정말 잘 배운 사람이다. 실제로는 [통다기(×), 통다글(×), 통다근(×)]으로 발음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아래를 보고 특이점을 발견해 보자.

닭, 흙, 칡
갉다, 굵다, 긁다, 늙다, 낡다, 맑다, 밝다, 얽다, 옭다, 묽다


‘ㄹㄱ’으로 끝나는 명사가 동사, 형용사보다 현저히 수가 적다. 이것은 ‘ㄹㄱ’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겹받침을 가진 명사는 겹받침을 가진 동사, 형용사 수보다 훨씬 적다. 원래 겹받침을 가졌던 말이 홑받침을 가진 말로 변화하는 속도가 명사가 훨씬 더 빠르기에 생긴 일이다. ‘닭은, 흙은, 칡은’과 같은 발음을 할 때 ‘ㄹ’을 탈락시킨 발음이 빈번한 것은 이런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음절말의 자음을 단순화하려는 언어 변화 과정이 반영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첫째 음절이 아닐 때 훨씬 더 빨리 일어난다. ‘닭은’에서보다 ‘통닭은’에서 ‘ㄹ’ 탈락 발음이 더 많이 일어나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닭’을 소리 낼 때 ‘ㄹ’이 없어진 것처럼 발음하더라도 우리의 머릿속 사전은 여전히 /닭/이라는 것이다. 머릿속 사전의 변화 속도는 말의 변화보다 훨씬 늦게 변화한다. 의미적 연관성에 유지하려는 속성 때문이다.

아주 먼먼 어느 날 우리 대부분이 ‘닭은’을 [다근]으로 발음하고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을 때가 돼서야 /닭/이 /닥/으로 변화된 것이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발음이 그 변화를 이끈다는 점이고, 그래서 우리의 발음이 때로 많이 복잡해진다는 점이다.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맞춤법#닭#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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