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결빙의 아버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1942∼ )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 한 중년 신사가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자동차를 타고 있는지, 전철을 타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심히 한강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얼음 조각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얼음 조각들이 마치 아래의 자잘한 물살들을 품어주는 커다란 등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커다란 등. 그것은 이 중년 신사에게 몹시 익숙한,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를 불러왔다. 어린 시절의 그는 외풍이 심한 집에 살았지만 추운 겨울에도 아버지의 체온으로 따뜻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억이 떠오르면서, 한강이 순식간에 아버지로 변신하는 부분은 참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 덕택에 중년의 신사는 오늘의 한강교 위에서 다시금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마법 같은 회상의 순간은 중년 신사의 건조한 일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가 아들의 언 발을 녹여 줬던 것처럼 말이다. 부자들만 유산이 있을까. 한강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아들은 좋은 기억, 훌륭한 유산을 받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결빙의아버지#이수익#아버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