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어느날 모든 인터넷이 끊겼다, 한국은 어떻게 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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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잦아지는 ‘최악 사건들’ 대비태세 알아보니


2004년 개봉한 ‘투모로우’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류 변화가 빙하기를 앞당긴다는 설정을 토대로 한다. 바닷물 전체가 하나의 벨트처럼 순환한다는 ‘컨베이어벨트 이론’이 그 근거다. 영화를 연출한 롤란트 에머리히는 할리우드 최고의 재난영화 전문 감독이다. 그는 5년 뒤 또 하나의 지구 멸망 블록버스터 ‘2012’를 내놨다. 지구 재앙의 원인이 지구온난화에서 태양흑점 폭발로, 결과가 빙하기에서 대홍수로 바뀌었을 뿐 아버지가 가족을 구한다는 큰 줄거리는 같다. 다른 게 하나 있긴 하다. ‘투모로우’에서는 정부가 과학자의 의견을 무시한 채 허둥지둥하지만, ‘2012’에선 국제협력까지 이뤄내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만든다는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설정은 허무맹랑하다. 과학이론을 일부 빌려왔지만, 엄청난 과장에 다소의 왜곡을 더했다. 따라서 일어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러나 만에 하나 설정이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인간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미래의 극단적 사건’이 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런 사건을 ‘X-이벤트’라 부른다.

○ X-이벤트가 잦아지고 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심장부에서 9·11테러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형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장면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충격적이었다.

X-이벤트는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예측할 수 없다. 징후가 있다 해도 참고할 데이터가 없다. 역사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X-이벤트는 정부나 기업이 흔히 언급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와는 분명 다르다. 특허소송에서 진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일부 제품을 판매할 수 없게 된 것을 ‘최악의 경우’라고 한다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로 인해 미국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은 ‘X-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대비할 수 없기에 충격파가 엄청나게 큰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물론 X-이벤트가 나쁜 일만 일컫는 건 아니다. 불의 발견, 수레의 발명, 페니실린 발견 등은 인류의 현재를 있게 한 혁명적 사건들이었다.

X-이벤트의 원인은 다양하다. 가장 쉽게는 외계의 침공이나 천재지변처럼 상상할 수 없었던 외부의 충격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실수나 판단 지연, 사소한 다툼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미래연구센터(CSF)의 박병원 센터장은 “복잡한 인간사회에서 수많은 핵심 동인들(Shock Triggers)의 상호연쇄반응이 사건을 증폭시켜 결국 X-이벤트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초대형 쓰나미라는 자연재해에다 보조발전기를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설치한 부적절한 설계, 그리고 초기대응 실패라는 인재(人災)가 맞물려 나타났다.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촉발된 국제금융시장 불안도, 1990년대 말 한국의 외환위기도 다양한 원인이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였다.

현대의 사회구조는 점차 복잡해지고 있다. 전 세계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정보 개방도 가속화하는 중이다. 과거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X-이벤트의 출현 가능성도 높아졌음을 뜻한다. 윤정현 STEPI 연구원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준비가 최선”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X-이벤트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가 2009년 시작한 ‘인류사회의 X-이벤트’ 프로젝트는 이런 문제에 대한 인간의 첫 도전이다. IIASA에서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했던 존 카스티 박사가 빈(Wien)에 ‘X-센터’를 설립하는 등 관련 연구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 당장 인터넷이 사라진다면?

CSF는 올 초부터 ‘4가지 쇼크와 한국’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이는 IIASA의 세부 프로젝트인 ‘7가지 쇼크와 핀란드’의 한국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올 2월 최종보고서가 나온 핀란드 프로젝트는 ‘경쟁기업의 노키아 인수 또는 노키아 본사의 해외 이전’ 등 7가지 X-이벤트를 분석했다. CSF는 국제비교연구를 위해 핀란드 프로젝트와 동일한 주제도 포함시켰는데 ‘인터넷의 단절’도 그중 하나다. CSF가 미래연구 계간지 ‘퓨처 호라이즌’ 최신호에서 소개한 ‘인터넷 단절 시나리오’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에 대지진이 발생해 수도권에 몰려 있는 통신사의 메인 서버가 파괴된다. 인터넷 해양 케이블도 동시에 손상을 입어 국가 간 인터넷 연결이 어려워진다. 이 틈을 노린 외부세력의 사이버공격이 다량의 컴퓨터 시스템을 망가뜨림으로써 국내 인터넷망이 완전히 차단된다. ‘인터넷 단절’이라는 X-이벤트가 발생한 것이다.

금융시장이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주식시장이 마비되고, 인터넷뱅킹과 신용카드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2차적으로는 자금 유동성이 악화되고 금융업무가 마비돼 결국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진다. 정부기관이나 일반 기업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한 업무가 중단되고 외부와의 소통에 차질이 생긴다. 병원의 환자관리시스템 미비로 진료사고가 증가하고, 전기, 가스, 상하수도 시스템 등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인터넷 단절이 장기화할 경우 문화·관광이나 교육·노동 분야도 직접적 타격을 입어 콘텐츠 시장 붕괴, 교육 시장 획일화, 고용 시장 경색 등의 다양한 사회문제가 대두된다. 치안이 부실해지고 안전사고가 잇따르면서 사회 불안 및 공포 분위기가 만연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한국과 핀란드를 비교해 보면 위기 발생의 원인부터 차이가 난다. 우선 핀란드에선 인터넷 단절을 유발하는 핵심 동인이 고도로 훈련된 국제 해커조직의 공격이었다. 최근의 경제침체로 고도화된 보안서비스에 투자하지 못했고, 사이버공격에 대한 대비책도 허술하다는 나라 현실이 고려됐다. 한국의 경우는 물리적 충격에 해커 공격이 더해진 복합요인이 인터넷 단절을 유발하는 것으로 추측됐다. 한국이 인터넷 관련 기반시설 및 시스템이 매우 견고한 반면 주변국 정세를 배경으로 한 사이버테러 발생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는 점이 감안됐다.

양국 모두 인터넷 단절의 파급효과가 가장 빠르게 확산되는 분야는 금융과 행정·인프라 부문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식량 공급 문제. 핀란드는 인구밀도가 낮고 전통시장이나 상점이 적어 온라인 유통시스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즉 식량이 각 생산지에서 일단 중앙으로 집결했다가 주문에 따라 다시 분배된다. 그 때문에 인터넷 단절은 식량공급 차질과 직결된다. 반면 오프라인 유통망이 잘 발달한 한국에선 온라인쇼핑이 불가능하다고 쌀을 사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 X-이벤트는 새로운 도전과제

후쿠시마 원전 설계자는 이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의 최대 강도(리히터 규모 8.3)에 대비해 높이 10m의 방벽을 쌓아 두었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은 규모 9.0으로 14m가 넘는 쓰나미를 불러왔다.

박 센터장은 “자연재해로 인한 X-이벤트는 예측할 수도 없지만, 예측한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며 “다만 인간의 실수나 부적절한 판단으로 생길 수 있는 X-이벤트는 어느정도 완화할 여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막지 못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매뉴얼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핀란드 출신인 리나 일몰라 IIASA 선임연구위원은 X-이벤트의 대응 전략으로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고 △새로운 기회를 선점하는 민첩성을 배양하며 △새로운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극단적 사건을 겪더라도 적응하고 살아남으면 회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며 “X-이벤트를 학습의 기회로 삼는 나라가 미래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X-이벤트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투모로우의 정부가 정답일지, 윤리 문제나 방법론을 떠나 X-이벤트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2012의 정부가 정답일지는 누가 봐도 자명하다. 이는 한 기업, 한 가정, 한 개인으로 축소해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채널A 영상]2012년 12월 21일,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X-이벤트#대비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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