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를 노래 점수 매겨 ‘나가수’ 식으로 뽑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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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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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방식 서술형 심사서 점수제 변경 논란


《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 김금숙 김혜란 씨, 전수교육조교 이호연 김장순 김영임 씨는 이달 중순 편지 한 통을 받고 하나같이 할 말을 잃었다. 문화재청이 보내온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2012년도 문화재위원회 무형문화재분과 회의 결과, 경기민요는 현재 유파를 인정하지 않고 보유자가 2명이 있어 전승 단절의 우려가 없으므로 보유자를 추가 인정하지 않음.’ 다섯 사람은 지난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되기 위한 절차를 밟은 뒤 이제나저제나 그 결과를 기다리던 터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 인간문화재를 ‘나가수’ 방식으로 심사?

경기민요를 둘러싼 파열음은 문화재 지정 방식이 바뀌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월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보유자(보유단체)인정·전수교육조교 선정에 관한 운영규정’을 시행하면서 문화재 지정 방식을 서술형 심사에서 점수제로 바꾸었다. 총점 100점 만점으로 전승기량 40점, 전승의지 20점, 전수활동 기여도가 40점이다.

경기민요는 새로 마련된 점수제의 첫 번째 적용 대상 중 하나가 됐고, 이에 따라 경기민요 명창 5명은 지난해 6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국문화의집에서 심사위원들 앞에 서서 기량 평가를 받았다.

A 후보는 “40∼50년씩 민요를 불러왔는데 누가, 어떻게 점수를 매긴다는 것인지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시험을 안 보면 아예 후보에서조차 탈락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했다”면서 “그래 놓고 보유자를 선정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보니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한 국악계 원로는 “보유자 후보나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된 시기가 사람마다 다른데 동등한 위치에 놓고 평가를 한다는 것은 평생 해당 분야에 헌신해온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가수’ 방식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 경기민요 유파 인정이 옳은가

점수제 외에도 이번 논란의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경기민요의 유파 인정을 둘러싼 국악계의 의견 충돌이 꼽힌다. 경기민요 분야는 그동안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1997년 안비취 명창이 타계한 뒤 같은 해 제자 이춘희 씨가 보유자 자리에 올랐다. 묵계월 명창은 2005년 건강상의 이유로 스스로 보유자에서 물러나 ‘명예보유자’가 돼 현재 이은주 명창만이 유일하게 경기민요 1세대 보유자로 남아 있다.

묵 명창은 2005년 물러나면서 한 제자를 보유자로 밀었지만 전승자들 간 의견이 대립하고 문화재청 심사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면서 2008년 차기 보유자 충원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보유자 중심의 전승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문화재청은 한국국악학회에 의뢰해 유파 인정 관련 용역을 실시했고, 2009년 2월 경기민요의 유파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전의 관행을 따르자면 묵 명창의 빈 자리는 그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 맞다. 묵 명창의 제자 중 유창 명창이 2009년 5월 서울시 무형문화재가 되면서 김영임 명창만이 남은 상황. 하지만 문화재청이 유파를 인정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다른 유파 제자들도 희망을 갖게 됐다. 김영임 명창은 2001년 전수교육조교로 인정을 받았다. 다른 후보자들은 모두 1990년대에 보유자 후보나 전수교육조교가 됐다.

국악평론가 김문성 씨는 “35년이 넘게 경기민요를 저마다의 색깔로 전승한 계보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용역에 참여한 김영운 한양대 국악과 교수는 “베토벤 작품을 저마다의 개성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음악적인 개성의 표현 차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 인간문화재 되기까지…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한 과정은 ‘하늘의 별 따기’다. 먼저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찾아가 배우기를 청해서 허락을 받은 뒤 최소 3년간 공부를 해야 한다. 보유자는 3년 이상 배운 학생들 중 재능을 인정할 만한 학생에게 이수증을 발급한다.

이수증을 받은 뒤에는 최소 5년간 보유자와 함께 활동하거나 관련 분야에 종사해야 전수교육조교가 될 자격을 얻는다. 이 과정은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해 끝내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경우도 많다. 전수교육조교는 보유자의 추천 등을 통해 문화재위원회에서 대상자를 지정한다.

무형문화재 보유자는 기존 보유자가 사망하거나 보유자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지정된다. 문화재청이 신규 지정 요건을 조사해 추가 지정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전수교육조교 중에서 보유자를 지정한다.

경기민요의 사례에서 보듯 상대적으로 인기 있는 분야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인기 분야의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면 명예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득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각종 공연의 참석 요청이 크게 늘어나고 무형문화재 전수를 바라는 제자나 기타 일반인들도 훨씬 많이 찾아온다. 정부는 보유자에게 매월 100만∼130만 원, 전수교육조교에는 50만∼70만 원, 이수 학생들 중에서는 보유자의 추천으로 장학생을 선발해 20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한다. 보유자는 전수교육조교 지정에 영향력을 가지며 이수증을 발급할 수 있는 권한도 갖는다.

그러나 민요나 판소리 등 상대적으로 전수가 활성화된 분야를 제외하고는 제자들이 없어 무형문화재 전승의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분야도 많다.

국악계에 종사하는 한 예능인은 “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은 문화유산을 전수하기 위한 제도인데도 일반인들이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점도 인기 분야의 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무형문화유산 상품화해 홍보 창업지원도 추진 ▼

■ 문화재청, 법률 제정키로


앞으로 김치나 아리랑처럼 보유자 및 보유 단체가 없는 종목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문화재청은 올해 ‘무형문화유산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가칭)을 제정할 계획이다. 무형문화재로 인정되지 않았던 농경·어로 등에 관한 전통지식, 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습관 등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이는 중국이 지난해 2월 무형문화유산법을 제정하면서 아리랑 씨름 농악무 전통혼례 등을 중국의 무형유산으로 범주화하고 세계지적재산권기구가 ‘지식재산권 보호에 관한 국제협약’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데 대응하기 위한 조치다. 정부는 지난해 전통지식이나 전통문화표현물에 관한 ‘지식재산 기본법’을 제정한 바 있다.

문화재청이 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에 관한 세부사항 규정을 신설한 것도 이런 무형문화유산 정비의 일환이다. 먼저 법률 제정을 통해 명칭을 바꾼다. ‘무형문화재’는 ‘무형문화유산’, ‘전수교육조교’는 ‘전승교수’, ‘중요무형문화재’는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바꾼다. 문화재보다 넓은 의미인 문화유산을 사용하는 것이다.

무형문화유산의 범위도 확장해 △전통적 공연·예술 △공예 미술 등에 관한 전통 기술 △한의약, 농경·어로 등에 관한 전통지식 △구전 전통 및 표현 △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관습 등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문화재청은 전통공예품 인증제를 도입하고 창업이나 제작 유통에 대한 지원 규정을 신설해 무형문화유산을 상품 형태로 국내외에 널리 알릴 계획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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