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사형대 옆에서도 연극은 계속 되리니…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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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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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 연기 ★★★★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에서 발걸음마다 피를 뚝뚝 흘리는 인간백정 드로바츠(김현웅)는 무대에 서지 못하는 여배우 소피아(조선주)에 감화돼 사랑을 고백하면서 피 흘리기를 멈춘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에서 발걸음마다 피를 뚝뚝 흘리는 인간백정 드로바츠(김현웅)는 무대에 서지 못하는 여배우 소피아(조선주)에 감화돼 사랑을 고백하면서 피 흘리기를 멈춘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조국은 점령됐다. 남자들은 끔찍한 고문 끝에 시장 한복판에 설치된 사형대에서 줄지어 처형당한다. 상복 입은 여성이 넘쳐나는 마을에 유랑극단이 찾아온다. 배우들은 사형대 그림자가 떨어지는 무대 위에서 점령국 극작가의 비극을 무대에 올리려 한다. 성난 주민들은 “초상집 앞에서 연극은 무슨 연극이냐”며 반발한다. 배우들은 항변한다. “전쟁 중에도 빵집 주인이 빵을 굽고, 교사가 학교를 지키듯 배우는 극장에 있어야 한다”고.

세르비아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원작을 극화한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연출 이병훈)는 이런 극한상황을 통해 연극과 예술의 존재 의의를 묻는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연극은 공연될 수 있을까. 아니 공연되어야만 할 것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극단 대표인 바실리에(김명수)는 “배우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현실적 논리로 이를 돌파하려 한다. 중년 여배우 엘리자베타(이정미)는 “연극과 빵을 비교할 수는 없다”며 예술의 우위를 논한다. 낭만적인 젊은 여배우 소피아(조선주)는 “사람이 왜 먹고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연극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현실과 연극을 혼동하는 광기어린 젊은 배우 필립(정나진)은 “나무칼로는 용의 배를 가를 수 없고, 독재자를 찌를 수 없단 말인가”라며 현실을 초월하는 이상과 환상의 힘을 역설한다.

그러나 주민들과 점령군(나치 독일군)의 반응은 모두 싸늘하다. 주민은 점령군사령관의 저격 현장에서 체포된 마을 청년의 생존 문제로 전전긍긍하고, 점령군은 암살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그런 현실에서 연극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절망의 순간 놀라운 희생과 구원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독일군의 사형집행인으로 피를 뚝뚝 흘리고 다니던 인간백정 드로바츠(김현웅)가 아름다운 소피아에 감화돼 부끄러움에 눈을 뜬다. 필립은 연극과 현실을 혼동해 자신이 암살을 저질렀다는 대사를 외치다 독일군 총을 맞고 희생되면서 마을 청년의 생명을 구한다.

그렇게 연극으로 대표되는 예술은 현실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적 위상에 올라선다. 수치와 원죄, 희생과 구원의 기독교적 이중주가 현실을 초월한 환상의 힘으로 현실에서 꽃필 수 있음이 시적 상징 가득한 무대언어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 지점에서 쓸모없음(무용·無用)이 오히려 큰 쓸모(대용·大用)를 낳는다는 동양의 노장사상과 공명한다. 끝내 공연을 못 올리고 다시 길을 떠나는 배우들의 초라한 뒷모습이 탁발승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이유다. 2만∼5만 원. 28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1644-2003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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