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가죽공예에 빠진 남자들

  • 입력 2009년 7월 10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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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단하게 여몄던 넥타이를 풀어버렸다. 그리고 공방을 찾았다. 칠하고, 꿰매며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공방. 으레 여자들이 솜씨를 부리는 곳으로 여겨지던 공방에 남자들의 발길이 요즘 부쩍 잦아졌다.

그 발길을 쫓아 따라간 곳에서는 수컷의 향이 짙게 배어났다. 동물적 냄새, 가죽 냄새다. 공방에서 가죽을 만지고 있는 장인에게 물었다. “남자들이 왜 가죽공방을 찾나요?” “가죽이야 원래 남자들이 좋아하죠.” 당연한 걸 물었다. ‘레더 노트(leather note)’의 관능적인 향을 잠시 잊었다. 남성 향수의 대표적 향이 가죽 냄새 아닌가.

손재주 있는 요즘 남자들은 향에만 취하지 않는다. 직접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 자신만의 개성도 풀어내야 한다. 키홀더에서 가방까지 뚝딱뚝딱 제 손으로 만들어낸다.》

○ 수컷의 향기와 질감에 홀리다

2일 오후 6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한샘가죽공방에는 이미 30대 남성 한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작업대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한 그는 이리저리 가죽을 만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건축설계 일을 한다는 박동현 씨(33)는 “모처럼 쉬는 날이라 작정을 하고 나왔다”고 했다. “3시간째인데 지금까지는 만족스럽네요.”

조각까지 새겨진 빨간 색 가죽 지갑이 그럴 듯한 모양새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직업상 만지는 걸 좋아해요. 모형제작도 해봤는데, 요즘 주위에서 가죽공예를 많이 하더라고요.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박 씨는 집에서 직접 지갑 도안까지 그려왔다며 수첩을 펼쳐 보였다.

박 씨의 옆에서 “구멍을 좀 더 작게 뚫어야지”라며 추임새를 넣는 방미자 공방 대표는 “매일 저녁이면 직장인들 3∼4명씩 공방을 찾는다”며 “가죽공예를 취미로 즐기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거들었다.

바쁜 직장인들이 가죽공예에 매달리는 이유는 가죽의 끝 모를 매력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김학순 가죽공방’의 김학순 씨는 “가죽으로는 못 만드는 게 없다”고 가죽 공예의 매력을 잘라 말했다. 작은 장신구에서부터 문구류, 가방, 대형 장식품까지 다 만들 수 있는 게 가죽이라는 것.

오토바이 헬멧서 카메라 케이스까지 ‘내 멋대로’

김 씨는 또 “같은 소재를 사용해서 만들어도 만든 사람에 따라 다른 작품이 나와요. 잘 만들었으면 잘 만든 대로, 못 만들어도 나름의 멋이 있는 게 가죽”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수제품이라는 의미까지 더해져 특별한 선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가죽의 다양한 매력만큼이나 공예에 빠지는 사람들의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할리데이비슨과 같은 오토바이나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라이더가 가죽 소품을 찾다 직접 제작에 나서기도 하고, 문구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다이어리 표지 등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사례도 있다.

가죽공예 공구를 판매하는 한 업자는 “가죽 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취미를 갖고 있다”며 “자전거에 장착할 가죽 소품이 필요하다거나 사진 찍는 취미가 있어서 카메라 케이스에 관심을 갖게 돼 자연스럽게 가죽 공예로 이어지는 예가 많다”고 전했다.

오토바이 라이더 이원형 씨(34)는 “오토바이를 타다 보면 소품 욕심이 생기는데, 제대로 된 가죽 헬멧 하나 사는 데도 수십만 원이 든다”며 “한 번 배워서 도구를 갖춰놓으면 가죽 재료만 사다 여러 소품을 만들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 개인 작업실 갖추며 전문가로 도약

취미로 시작해 전문가 반열에 오른 사람도 적지 않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하는 최명호 씨(33)가 대표적이다. 그는 온라인에서 ‘가방 만들기’라는 카페를 운영하는데, 가죽공예 카페 중에서는 손꼽히는 규모다. “남자들이 들고 다닐 만한 가방이 별로 없어요. 눈은 높죠, 명품은 비싸죠. 그래서 직접 만들겠다고 나섰어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가죽 공예를 배울 만한 곳이 없어서 일본 서적을 사다 번역해 가며 배웠어요.” 2년 전 마음에 드는 가죽가방이 없어서 시작했다가 지금은 취미 수준을 넘어섰다.

최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 자신의 집에 작업실까지 차리고 퇴근 후면 작업에 매달린다. 4일 찾은 그의 작업실은 여느 공방 못지않았다. 10㎡(약 3평) 남짓한 공간에 각종 공예 도구와 가죽, 실 등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그가 직접 만든 가죽제품 수십 점도 진열돼 있다.

“국내에는 수제품을 만들 가죽용 도구가 없어 대부분 수입품을 쓰는데 가격이 좀 비싸요. 작업실 갖추면서 빚 꽤나 졌어요.” 그렇게 말해놓고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는 그의 모습은 순수해 보였다.

최 씨는 주말이면 카페 회원을 대상으로 강습을 하는데 이날 역시 강습생 2명이 그에게서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었다. 가죽을 자른 단면에 섬세하게 약품처리를 해보이던 최 씨는 “아직 국내에는 가죽 공예가 체계화 되어 있지 않아서 개인의 노하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며 “가죽 마감 방법이나 공정 하나하나가 기업으로 치면 영업 비밀”이라고 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권종식 씨(35)도 온라인에서 가죽 공예 전문가로 유명하다. “20대에는 전자 제품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가죽 케이스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3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가방 하나를 사더라도 고급 가죽으로 된 제품을 갖고 싶더라고요.” 권 씨 역시 다른 취미가 계기가 돼 지난해부터 알음알음 시작한 것이 어느새 전문가 수준이 됐다. 권 씨는 “자료를 수집해 독학으로 배우면서 카드지갑, 명함지갑 등을 만들어봤는데, 블로그에 올리자마자 바로 ‘사고 싶다’는 반응이 왔다”며 “내가 만든 가죽 제품을 다른 사람들이 탐낼 정도로 소질이 있구나 싶어 푹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권 씨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도 가죽 공예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는 “키홀더 같은 소품을 만들어 주변에 선물하기도 하는데, 만든 작품을 보고는 한 번 배우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며 보람 있어 했다.

○ 가죽 공예가로 전업 선언하기도

가죽공예는 그 실용성 때문에 취미 이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김학순 공방에서 만난 중년의 임삼택 씨(54)는 돋보기를 쓴 채 허리 벨트 모양으로 재단한 가죽에 조각을 하느라 망치질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가죽 옷 장사를 하는데, 가죽 소품도 직접 만들어 팔아볼 생각”이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중랑구 중화동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그는 매일 오후면 서초구 반포동 공방까지 길을 나선다고 했다.

최명호 씨의 개인 작업실에서 강습을 듣는 김효숙 씨(44·여)는 이름난 동화작가다. 정 씨는 “책 만드는 일을 하다보니 표지에도 관심이 많은데, 가죽 표지도 좋겠다 싶어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이제 한 달가량 배웠다는 그는 “가죽 공예는 몇 시간만 투자하면 그럴듯한 완성품이 나오니 만드는 보람이 있다”며 “일에도 활용할 수 있지만 특히 남편이 가죽 제품을 좋아해 선물로도 그만”이라고 좋아했다.

가죽 문구류로 유명한 탄조공방도 출발은 직장인들의 취미였다. 이 공방의 김재혁 대표는 원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제작하는 사업자였다. 김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2007년부터 가죽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기술을 배우다 보니 평생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가죽공예 카페에서 만난 후배 2명과 함께 지난해 말 마포구 서교동 홍익대 앞에 공방을 열었다. 그는 “주말마다 가죽 공예 강습을 하는데 취미로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직업적으로 진지하게 기술을 활용해 보려는 분들도 많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가죽 공예에 대한 관심이 늘긴 했지만, 공예품이 명품 대접을 받는 단계는 아니다. 김 대표는 “좋은 가죽을 쓰고 모든 공정을 손으로 하기 때문에 여느 브랜드 못지않은 가격에 제품을 내놓고 있는데, 비싸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 수익이 좋은 편은 아니다”고 귀띔했다. 수제품보다는 브랜드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큰 탓이다.

일례로 최근 준전문가들이 모여 가죽 제품 전시회를 열었는데, 손님들이 디자인에 반해 제품을 들었다가도 가격을 듣고 내려놓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한 가죽 공예가는 “이틀 이상 꼬박 손바느질을 하며 만든 가죽 가방을 지인에게 얼마에 사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근데 ‘가죽이니까 한 3만 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명품 브랜드에서도 100% 수작업 제품은 없는데…. 아직 가죽 공예로 먹고살기는 힘들다”고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글=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하루코스 강좌만 들어도 혼자서 뚝딱▼

한 땀 한 땀 꿰맨 바늘땀, 고급스러운 광택, 세련된 디자인…. 수작업으로 만든 가죽 공예 제품을 누구나 욕심내지만 직접 만들어 볼 엄두를 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가죽 공예의 장점을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첫손에 꼽는다.

온라인에서 가죽 공예 전문가로 통하는 권종식 씨(35)도 “가죽 공방에서 여러 강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하루짜리 강좌를 들어보면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가까운 공방을 찾아가보면 생각보다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단 시작 전에 본인이 원하는 가죽 공예 스타일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국내 가죽 공예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염색과 카빙(조각)을 위주로 한 기법이다. 통가죽에 문양을 조각해 화려한 색감으로 염색을 한다. 다른 하나는 재단과 바느질만으로 작품을 만드는 기법이다. 염색된 고급 가죽을 재료로 이용하고 조각이나 염색 등 다른 장식적 요소는 배제한다.

염색과 카빙 기법의 가죽 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김학순 공방, 한샘가죽공방이 대표적이다. 10년 이상 가죽 공예를 이어 온 곳들이다. 염색된 가죽을 사용하는 기법은 국내에 최근 들어 소개되고 있어 대부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있다. 네이버 카페 ‘가방 만들기’의 운영자 최명호 씨(33)는 “일본 스타일로 불리는 이 기법은 관심 있는 사람들이 외국 서적을 통해 알음알음 배워 최근에서야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참고 서적조차 없다”며 “처음에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개인 작업실이나 공방을 차린 전문가에게 강습을 들으면 된다”고 소개했다. 가죽공예를 처음 시작한 사람도 4시간 정도면 그럴 듯한 가죽지갑 하나는 손에 쥘 수 있지만 과욕은 금물이다. 초기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각종 공구와 가죽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최소 50만 원 선이다. 전문가들은 “값비싼 공구들을 갖춰 놓고 시작하기보다는 강습을 먼저 듣고 계속 취미로 즐길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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