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그냥 그렸다, 그냥 通했다… 요절작가 박이소 첫 유작전

  • 입력 2006년 3월 1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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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유작전에 선보인 ‘팔라야바다’(2004년). 그가 작품계획서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 친구와 제자들이 완성해 2005년 미국 어바인대 미술관의 추모전에서 전시됐고, 이번 유작전을 위해 다시 제작됐다.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구와 제자들이 보낸 추모의 글과 작품이 바닥의 모니터에 비친다. 사진 제공 로댕갤러리
박이소 유작전에 선보인 ‘팔라야바다’(2004년). 그가 작품계획서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 친구와 제자들이 완성해 2005년 미국 어바인대 미술관의 추모전에서 전시됐고, 이번 유작전을 위해 다시 제작됐다.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구와 제자들이 보낸 추모의 글과 작품이 바닥의 모니터에 비친다. 사진 제공 로댕갤러리
《사군자의 난초도 아니고, 종이 위에 먹으로 잡초를 쓱쓱 그려놓은 드로잉이 떡하니 전시장에 걸려 있다. 제목은 ‘그냥 풀’이란다. 또 다른 작품 ‘잡초는 자란다’에는 풀 몇 포기가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백지에 인공 눈물을 떨어뜨린 뒤 말린 자국이 남아 있는 작품의 이름은 ‘긴 사연’이고 국수 그릇에서 공중으로 뻗쳐 올라간 세 갈래 가닥은 ‘3위 일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쯤 되면 작품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상관없이 입가에 슬며시 웃음을 베어 물 수밖에 없다. ‘탈속(脫俗)의 코미디-박이소 유작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로댕갤러리의 전시장을 돌아보면 이렇듯 삶의 부조리함과 이면성을 폭넓은 발상, 놀이와 유머 각감으로 담아내고자 한 작가의 성찰과 만나게 된다.》

이번 전시회는 47세의 나이로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한 박이소(1957∼2004)의 첫 번째 회고전. 평면과 설치, 퍼포먼스를 통해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박이소는 생전의 업적에 비해 대중의 주목을 받진 못했으나 다음 세대 젊은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작가의 친구이자 객원큐레이터로 전시를 기획한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는 “박이소의 작품엔 탈속적인 성향과 코미디가 기묘하게 결합돼 있다”며 “이는 문화적 주류에 대항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끈질긴 반성의 연장선에서 얻어진 박이소식 웃음의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본명은 박철호. 홍익대를 졸업하고 미국 프랫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그는 미국에서 마이너리티로 살면서 ‘박모’라는 이름으로 단식 퍼포먼스도 펼치고 진보적인 전시공간인 ‘마이너 인저리’를 운영했다. 1994년 귀국한 뒤에는 박이소란 이름으로 제자들을 기르고 광주비엔날레(1997년) 베니스비엔날레(2003년)의 참여 작가로 활동했다.

전시장 한편에선 작가의 육성이 담긴 비디오 인터뷰를 볼 수 있다. “내가 진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다른 사람이 만족하는 작품보다 더 중요하다.” “내 작품은 거칠고, 완성되지 않고, 우스워 보이고, 싸구려적이다.”

그는 늘 소통의 본질을 성찰했다. ‘북두팔성’이란 작품은 북두칠성 모양을 만들려다 우연히 별이 여덟 개가 된 것이 출발점이었다. 작가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오해와 소통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라고 할까. 별이 여덟 개라도 전체 모양이 북두칠성이면 누구나 그렇게 알아보는 데 문제가 없다.”

전시장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 10개의 인공조명으로 이뤄진 설치물 ‘당신의 밝은 미래’와 만난다. 관객은 벽 쪽으로 쏟아지는 강한 빛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야 한다. 벽과 조명 사이의 이 통로는 이해와 오해 사이의 틈을 상징하는 것.

작가의 동료였던 정헌이 한성대 교수는 “그는 지나칠 정도로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말하기 때문에 뭔가 심오한 것을 기대하는 관객이 오히려 어리둥절해지거나 겸연쩍은 느낌이 드는데, 말하자면 (자신이) 바람이 되고 싶으니까 (전시장에서) 선풍기를 돌린다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이 전시장엔 대형 선풍기 2대가 바람을 내며 돌아간다.

평면과 입체 등 46점이 전시된다. 5월 14일까지. 입장료 일반인 3000원, 초중고교생 2000원. 02-2259-7781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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