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만화]그리스 로마 신화 한반도 ‘대박 신화’

  • 입력 2003년 5월 15일 16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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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으로 만들어진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포스터. 제우스 헤라 등 주역이 되는 열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으로 만들어진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포스터. 제우스 헤라 등 주역이 되는 열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피카추-라이추, 니드란-니드리나-니드퀸, 이상해씨-이상해풀-이상해꽃, 파이리-리자드-리자몽, 꼬부기-어니부기-거북왕….(1999년 7월)

크로노스-레아, 제우스-헤라, 포세이돈, 하데스, 아테네-아폴론-아르테미스-아레스-헤파이스토스-아프로디테-헤르메스-디오니소스….(2003년 5월)

아이들의 ‘주문(呪文)’이 바뀌었다. 99년과 2000년 일본 만화 ‘포켓몬스터’의 변신 괴물 이름 152가지를 외우고 다니던 아이들이 이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을 꿰고 있다.

그 배경에는 2000년 연말부터 한국 출판시장을 뒤흔든 책이 있다. 그해 11월 1권이 출판돼 올해 5월 현재 모두 15권이 나온 가나출판사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이하 ‘그리스 로마 신화’)다.

가나출판사는 1000만부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산되는 이 책으로 2002년 한 해만 250억원의 매출, 100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다. 그림을 그린 만화가는 약 40억원의 인세 수입을 올렸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지난 몇 년간 세계 출판시장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해리포터’ 시리즈와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국내 한 인터넷 서점 집계에 따르면 이 서점에서 팔린 ‘신화’(1∼15권)가 13만9000여부, ‘해리포터’ 시리즈(4부 10권)가 13만4000여부였다.

책뿐만 아니다. 지난해 12월부터 SBS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각색한 TV용 만화영화 ‘올림포스 가디언’을 매주 방영하기 시작했다. 시청률은 초등학교 개학 전에는 13%, 최근에는 7%.

40여개 업체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캐릭터를 이용해 인형, 운동화 등 각종 상품 120여가지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달 말부터는 휴대전화를 통한 모바일 게임도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제 출판시장의 ‘대박’을 넘어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하나의 소재를 여러 산업 장르에 활용하는 것)’라는 문화콘텐츠 산업화의 길에 들어섰다.

신화의 끝은 어디일까?

● 아이들의 오묘한 눈높이

국내 한 인터넷서점 편집장 A씨(29)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우리 서점을 먹여 살리는 효자 상품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그림은 선 터치가 거칠고 마무리도 좋지 않으며, 아이들로 하여금 신화 속 인물들을 그저 캐릭터처럼 대하게 만든다는 것.

그러나 이 인터넷서점 사이트 독자서평란에 오른 서평 300여건은 대부분 초등학생들의 찬사로 채워져 있다. “순정만화풍 그림이 너무 예뻐요”,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순식간에 10권을 다 읽었어요”.

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 제우스, 포세이돈, 헤르메스 등 자기가 좋아하는 신들의 팬클럽을 만들고, 신화 속 3000여 신과 등장인물의 이름과 계보를 외우고 다닌다.

또 ‘이런 능력이 있고 저런 도구를 들고 다니는 이 신은 누구인가?’라는 식의 문제가 담긴 퀴즈 책을 끼고 다니며 암기 능력을 겨루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게임과 커뮤니티, 각종 자료 등으로 구성된 ‘그리스 로마 신화’ 인터넷 사이트(www.anigana.co.kr)는 지난해 8월 문을 연 이래 회원이 40만명을 넘었다. 회원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한 각종 주제로 자발적으로 만든 커뮤니티도 13일 현재 2519개에 이른다.

어린이 전용의 인터넷 사이트 ‘주니어 네이버 그리스 로마 신화’(myth.jr.naver.com)’에서 진행 중인 ‘좋아하는 신 투표’에는 지난해 8월부터 149만7118명이 참여했다. 가장 인기 있는 신은 13일 현재 40만8891표를 얻고 있는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

TV용 만화영화 ‘올림포스 가디언’을 기획한 SBS 콘텐츠사업부 김재영 차장은 “초등학생 아들놈이 자기 용돈을 모아 한 권씩 사서 읽는 것을 보고 TV용 만화영화가 성공할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장르를 엄밀히 구분하면 교양만화. 과거 학습만화는 대부분 흑백에 질 낮은 모조지,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포켓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신화’는 올 칼라에 고급 종이, 4×6 변형판(가로 18.5cm, 세로 24.5cm)으로 크게 만들었고 책값도 8500원으로 책정했다. 3차원 디지털 게임에 익숙한 어린이들의 시각에 맞추고 동시에 소장하고 싶은 책으로 내자는 전략이었다.

어린이만화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 바다출판사 김인호 사장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런 제작기법에 관해 “드라마틱한 내용과 캐릭터 사용법 등이 시대의 코드와 맞아 떨어졌다. 학습만화에 할리우드 기법을 도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 한국적 교육열의 역설

‘우리 딸은 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TV에서 고등학생들이 겨루는 퀴즈풀이를 하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 문제가 나오자마자 큰소리로 답을 외치는 거예요. 그런데 정답이었어요.’(전남 담양에 사는 예쁜 딸아이 엄마가)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독자서평란에 뜬 사연이다. 이처럼 어린 자식들의 나이를 뛰어 넘는 지식에 놀란 어머니들의 감격 어린 사연을 이 서평란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가나미디어 배상승 기획실장은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이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화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교양을 길러주고 교육적인 내용이라고 판단한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드래곤 볼’이나 ‘포켓몬스터’ 같은 코믹스(comics)류의 만화는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사준 것들이다. 또 기존의 교양(학습)만화에 대해서는 저급한 그림과 형식 때문에 구입을 내켜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급화와 한국의 교육열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전략을 구사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미화 실장은 지난해 그리스 로마 신화 열풍을 분석하며 “386세대 부모들은 어려서 만화를 읽고 자란 세대여서 초등학생 자녀에게 만화를 사주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배 실장은 “아이들 교육시킨다는 데 마다할 부모는 없다. 시대가 변해도, 활황이든 불황이든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교육 사업”이라며 “궁극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가 나갈 방향은 교육과 엔터테인먼트가 결합한 에듀테인먼트 사업”이라고 강조한다.

● ‘원 소스 멀티 유스’의 향방

‘신화’는 지난해 말부터 인형부터 모바일 게임까지 다양하게 ‘변신’해 왔다. TV용 만화영화, 문방구 운동화 가방 의류 시계 등 120여 종의 캐릭터 라이선스 사업, 그리고 휴대전화용 모바일 게임까지.

2004년 6월에는 변신의 최종 단계인 극장용 만화영화가 개봉된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사가 세계 배급을 맡기로 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가나미디어측은 한국과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지역 동시개봉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멀티 유스 전략은 2002년 초 ‘그리스 로마 신화’ 9권째가 나오면서 300여만부의 판매 실적을 올렸을 때 만들어졌다.

한국의 문화콘텐츠 산업 시장은 지난 10여년간 ‘원 소스 멀티 유스’를 실현할 콘텐츠, 즉 ‘킬러 콘텐츠(killer contents)’를 찾는 데 노력해 왔지만 ‘아기공룡 둘리’ 정도 외에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둘리는 원작 만화가 나온 뒤 캐릭터 상품이 만들어지고 극장용 영화가 제작되는 데 10여년이 걸렸다.

배 실장은 “극장용 영화가 성공한다면 단기간 내에 ‘원 소스 멀티 유스’를 충실히 이행한 첫 사례가 된다”고 말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도 “실현된다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그리스 로마신화’가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성공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의 최대 고비는 영화로 만들어진 뒤 국내 극장가에서 흥행에 성공하느냐는 점. 지난해 세계 최고 권위의 프랑스 앙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탄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가나미디어는 극장용 영화가 성공한다면 뒤를 이어 텔레비전용 만화영화의 속편을 20편 정도 더 제작할 계획이다. 극장용 영화도 10편 정도는 속편 제작이 가능하다고 예측한다. 콘텐츠의 ‘소스’인 그리스 로마 신화의 풍성한 내용과 탄탄한 이야기 구조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는 예상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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