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해도 이것만 하면 확실히 행복…20-30대가 빠진 ‘소확행’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1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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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베리즈(Red Berries): 10점 만점에 5.5점. 향과 맛이 굉장히 상큼한데 이게 장점이자 단점. 따뜻하게 마시면 너무 강한 듯.’

회사원 김현지 씨(26)는 요즘 ‘나만의 차(茶), 한 줄 리뷰’에 푹 빠졌다. 블로그에 올리거나 책으로 엮을 계획도 없다. “퇴근 뒤 요가를 하고 귀가해 넷플릭스를 틀어요. 그러곤 티 하우스(tea house)에서 사온 차 세트를 엽니다. ‘오늘은 어떤 종류를 마셔볼까’ 고민하고 차를 우려 음미하고 저만의 점수를 매기는 시간.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때죠.”

소확행(小確幸). 김 씨처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생활양식이 20, 30대에서 번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한 ‘욜로(YOLO·인생은 한 번뿐)’ ‘탕진잼(탕진하는 재미)’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소비보다 행위, 재미보다 행복감을 추구한다.

●소소해도 이것만 하면 확실히 행복하다

김 씨는 “지난해 입사한 뒤 낯선 사람과 섞이고 여러 곳을 오갈 일이 많아졌다”면서 “그런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반대의 일, 즉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혼자 꼼지락대는 게 제격”이라고 했다. 취업준비생 시절에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는 압박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보면 세상 쓸데없는 짓이 좋더라”는 게 김 씨의 말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른 게 소확행의 매력이다. 마크라메(macram¤·서양식 매듭) 같은 작은 예술부터 독후감 클럽, 차 즐기기 같은 작은 리뷰까지. ‘남들이 뭐래도 이것만 하면 난 확실히 행복하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살만하다’가 소확행의 태도다.

직장인 조인성 씨(41·가명)는 뜻밖에 장거리운전을 꼽았다. 조 씨는 “늘 보살펴야 했던 아내와 아이들이 곤히 잠든 차 안에서 무념무상 도로를 질주하다보면 나만의 시간이 이런 거지라는 생각에 행복감이 든다”고 했다. 그는 휴일이면 일부러 가족을 채근해서라도 지방 나들이를 떠난다. 직장의 중력에 짓눌린 온몸의 뼈를 필라테스로 해방하는 직장인, 정성스레 손톱을 깎고 영양제를 바르면서 하루 동안 쌓인 우울함을 날리는 프리랜서가 추구하는 것도 소확행이다.

이는 수십억 원대 부동산과 가상통화에 지친 현대인들이 다시 작은 것으로 돌아가는 신호라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동아방송대 교수)는 “대박, 대물 신화에 대한 환멸, 그리고 반작용으로 개인이 컨트롤할 수 있는 행위에서 자족감을 느끼는 행태가 나타난 셈”이라고 분석했다.

●현재>미래, 경험>소비

‘소확행’은 돈보다 경험을 중시한다. 투자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위한 것이라고 본다. 독서모임 스타트업 ‘트레바리’는 최근 전국 150여 개 독서클럽으로 확대됐다. 책이란 본디 혼자 읽는 것이지만, 젊은 층에게는 ‘내가 몸으로 느끼는 것’, 즉 체험의 독서가 중요해졌다. 라인드로잉(line drawing·선으로만 하는 드로잉) 동호인이 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신재은 빛뜰갤러리 원장은 “종이와 펜만 있으면 가능해 골목길, 작은 컵 하나도 예사롭지 않게 볼 수 있고 일상에 자신만의 해석을 담을 수 있어 인기”라고 했다. 최근 ‘꽃차 소믈리에’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직장인 황소영 씨(34)는 “찻잔도 아기자기하고 프리뮬러, 카렌듈러 등 꽃의 배합에 따라 예쁜 색감이 나오는 차를 음미하다 보면 이런 게 행복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회의 양적 성장을 더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 질적 변화에 대한 자극으로서는 유의미하다”면서도 “다만 일본의 경우처럼 개인주의가 사회 전체의 위축까지 불러 ‘스몰 소사이어티’로 갈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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