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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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도 아름
답게 ― 곽재구(1954∼ )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
미쟁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시인 곽재구는 울림이 굵은 시를 쓴다. 기교 없이 뜨끈뜨끈한 시를 쓴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 중에는 가슴이 물컹해지는 작품이 무척 많다. 그런데 조금 억울하게도, ‘사평역에서’의 인지도에 밀려 다른 작품들이 덜 회자되는 감이 있다. 다시 생각해봐도 시 ‘사평역에서’가 참 명작이기는 하다. 추운 겨울에 읽어보라. 가만히 있어도 발가락이 시려오면서, 마음에 서리가 핀다. 스산하게 쓸쓸한 분위기가 압권이다. 그 작품은 겨울로 미뤄두기로 하고 오늘은 곽재구 시인의 다른 시를 추천한다. 찾아보니 이 시를 애송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숨은 애독자가 많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시는 마음먹고, 작정하고, 대놓고 인간적인 세계를 지지한다. 아주 확실히 지지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인간성이 좋으면 손해나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선포한다. 아주 확실히 선포한다. 곽재구 시인은 머뭇머뭇하지 않는다. 인간은 당연히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독립군이 독립을 믿듯이 믿는다.

이때의 사랑은 내 딸이나 연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응당의 사랑,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당연의 사랑을 말한다. 희망이나 인권 따위는 호모 사피엔스의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앞에서 사랑 타령은 철 지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철 지났다는 말은,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장시간 지지되었다는 뜻과도 같다.

상상해보면 너무 좋다. 미장이와 대통령이 서로 네가 더 사랑스럽다 칭찬하는 사회. 지위가 아니라 인간이 먼저인 사회. 허구에 불과하다고 해도 떠올리면 뿌듯하다. 그러면 된 거다. 시는 된 거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곽재구 시인#바닥에서도 아름답게#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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