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위안의 詩]기형도 ‘숲으로 된 성벽’

  • 입력 2008년 10월 2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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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단어들도 서로 사랑한다.” 노벨상을 받은 멕시코의 위대한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말이다. 파스의 말처럼, 이 시의 단어들도 서로 사랑하고 있는 듯하다. 저녁노을, 신들의 상점, 하나 둘 켜지는 불빛, 농부들, 작은 당나귀들,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조용한 공기들…. 단어들의 사랑은 한없이 순하고 부드러워서, 단어들이 그려내는 풍경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단어들만이 아니다. 이 시의 아름다운 풍경들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 시인의 내면에서 나온 사랑이 그가 상상해낸 풍경들과, 그가 직조해낸 단어들 속에 들어가 자생하는 것이다. 사랑과 상상이 비슷한 말이며 행위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기형도가 사랑한(상상한) 풍경은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평화로운 성’이다. 동화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지닌 이 성은 온유하고 정결한 존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누구든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이 신성한 내면의 성에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간다 해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함부로 나무를 베어내는 욕심 많은 ‘골동품 상인’의 눈에는 이 성은 텅 빈 공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들과 작은 당나귀들과 마음이 가난한 시인에게 이곳은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성스러운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천국’이다. 이 시는 ‘숲으로 된 성’이 그 성을 상상해낼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자들의 것임을 말해 준다. 삶이 부딪치는 ‘거리’에서 시를 쓰고자 했고, 푸른 이십대에 생을 완결한 시인 기형도는 지금 그 성에 살고 있을 것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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