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뉴 트렌드]<3>‘포스트휴먼’ 인문학

  • 입력 2008년 3월 19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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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로봇’에는 인간적인 로봇과 기계적인 인간들이 등장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영화 ‘아이로봇’에는 인간적인 로봇과 기계적인 인간들이 등장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의 감정을 가진 로봇 데이비드가 탄생한다. 데이비드는 불치병에 결려 냉동상태로 잠들어 있는 아들을 둔 인간 가정에 입양된다. 데이비드는 자신을 입양한 사람들을 엄마, 아빠로 부르며 인간 사회에 적응해 간다. 그러나 친아들이 퇴원하자 데이비드는 숲에 버려진다. 자신을 로봇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데이비드는 엄마를 찾아 나선다.

영화 ‘A.I.’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인간의 감정까지 갖춘 로봇이 생산되는 시대, ‘생명’은 인간의 전유물인가.

#2. 21세기 중반,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 복제가 가능해진다. 부자들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을 복제한다. 아일랜드는 이렇게 복제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 복제 인간들은 자신을 주문 생산한 인간에게 장기를 제공한 뒤 폐기 처분된다. 이를 눈치 챈 링컨은 아일랜드를 탈출한다.

영화 ‘아일랜드’의 주인공 링컨은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복제 인간으로부터 장기를 이식받아 생명을 연장하는 시대,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인간-기계 경계 붕괴… 新인류 정체성 찾기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에 대한 논의가 최근 국내외에서 활발하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정보기술(IT), 인지과학, 나노기술, 바이오공학의 발달로 기술이 인간의 몸속에 삽입되거나 생활에 밀착됨으로써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해체되는 시대다. ‘신인류’로 불리는 포스트휴먼은 기계, 기술과 융합된 인간을 가리킨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논의는 그 특성상 과학계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최근 여기에 인문학자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방관하다간 자칫 인간이 배제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다. 또 삶과 죽음,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미래에 새로운 존재론, 가치관, 윤리관 정립을 위해 인문학이 나서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성균관대 인문과학연구소 등에선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문학 연구를 비롯해 인문학 관점에서 인문학과 기술의 결합을 모색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과 기술

인간과 첨단 기술의 융합이 심화하면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인문학의 첨예한 과제가 됐다. 인문학자들이 위기감을 느끼는 일들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詩)를 창작하는 기계의 출현. 1970년대 전위예술의 일환으로 시도됐던 기계 이용 시작(詩作)이 디지털의 발달로 이제는 인터넷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일부 학자는 가시적인 변화가 시작된 현재를 ‘트랜스휴먼(transhuman)’ 시대로 규정짓는다. 임정택(독문학) 연세대 교수는 “기술이 인간의 상상력을 추월할지 모른다”면서 “이 시점에서 인문학은 기술의 변화 속도에 대응하는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구의 인문학계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대한 모색이 한창이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도미니크 르쿠르는 “기술이 더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차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선에서 인간과 기술의 개념을 재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계발한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의 확장이다”고 말했다.

○상상력과 테크놀로지의 균형

임 교수가 이끄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연구진은 최근 ‘바퀴’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인간과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기에 앞서 인류의 기술을 문명사적 측면에서 해석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인문학, 자연과학, 공학 등 다양한 전공자가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모든 기술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바퀴를 먼저 연구하기 시작했다”면서 “포스트휴먼 시대의 화두인 인간과 기계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연구까지 폭넓은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학, 철학, 과학, 예술 등이 모두 망라됐지만 연구의 중심은 인문학이다.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시대의 새로운 윤리학을 정립하는 것도 연구의 큰 갈래 가운데 하나. 더 나아가 ‘바이오 인문학’ ‘나노 인문학’ 등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인문학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역까지 인문학 범주로 끌어들일 계획이다.

연구진은 이런 연구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테크네(techne) 인문학’이라는 분야를 설정했다. 테크네란 기술, 지식, 예술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임 교수는 “인간의 상상력과 테크놀로지의 능력 사이에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테크네 인문학의 목표”라고 밝혔다.

○미래를 전망하는 심층횡단

성균관대 인문과학연구소는 ‘미래 인문학’이라는 영역을 만들었다. 학문 분야별로 새롭게 정립돼야 할 인문학의 미래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에서다.

연구를 이끄는 이정준(독문학) 교수 등이 제시한 새로운 개념은 ‘테크노 퓨처리즘(techno futurism)’. 기술 중심의 미래주의를 뜻한다. 이 교수는 “첨단 기술이 사회를 지배하는 테크노 퓨처리즘 시대를 우선 전망하고 인문학의 역할을 따져볼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 방법론으로는 ‘심층횡단’ 개념이 도입됐다.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 등 다른 영역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기술과 현상을 분석하겠다는 의도다.

이종관(철학) 성균관대 교수 등은 이를 위해 인간과 기계의 능력과 한계를 판단할 수 있는 다국어 자동번역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했다. 또한 지능형 로봇을 위한 음성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고, 인공지능 및 인공생명 연구에 인문학적 콘텐츠를 대입하는 연구를 계획 중이다.

‘미래 인문학’의 목표에 대해 이종관 교수는 ‘상호창조(sympoiesis)’라는 개념을 들며 “다른 존재자들과의 교섭 속에서 상호 창조하는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포스트휴먼 시대’ 상상도

기억 - 감정 컴퓨터에 저장

컴퓨터가 인간 흡수할수도

영화 ‘매트릭스’나 ‘아이로봇’을 보면서 ‘미래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학자들이 들려주는 미래 이야기는 아직도 황당하게 들릴 때가 많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도미니크 바뱅 씨의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예측도 그중 하나다.

그는 “인류가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더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포스트휴먼 시대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30년 동안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감염사나 사고사 같은 의외의 죽음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선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남으라는 얘기다.

바뱅 씨는 또 인간이 의식, 기억력, 감정 등을 컴퓨터에 옮기는 기술도 상용화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대목에선 영국의 유전학자인 오브리 드 그레이 씨도 의견을 같이한다. 뇌에 저장된 기억을 슈퍼컴퓨터에 백업시켜 둘 수 있다는 것. 바뱅 씨는 인간이 유전자를 적극적으로 진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유전자 진화 능력에 따라 강화 유전자를 가진 엘리트 집단과 자연 유전자를 가진 일반 집단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래학자들에 따르면 ‘신인류’인 포스트휴먼은 현재의 인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육체적, 지적 능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시대가 인간에게 이로운 쪽으로만 예측되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컴퓨터에 종속되는 결과가 생길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미국의 컴퓨터 전문가 레이 커트웨일 씨는 17일 “현재의 기술 발달 속도대로라면 20년 안에 컴퓨터의 능력이 인간의 지능에 필적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래학자들은 “컴퓨터의 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인간이 컴퓨터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면서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컴퓨터가 인간을 컴퓨터의 일부로 흡수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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