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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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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

입력 2002-03-31 18:34수정 2009-09-1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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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1891∼1955) 선생은 우리 겨레가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할 때 교육 언론 산업분야에서 민족의 역량을 키워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했던 선각자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82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했던 인촌과 동(同)시대를 살았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인촌의 참모습을 재조명한다. 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동시대인들의 증언은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창씨개명-훈장 거부▼

1891년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현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태어난 인촌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기초를 마련했다. 1919년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민족기업을 일으켰고,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해 억눌린 민족의 염원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인촌은 이어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인재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언젠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족의 역량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수환(金壽煥·80) 추기경은 1991년 10월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추모했다. 김 추기경은 특히 “스스로 몸을 낮추어 항상 겸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서 남의 공로를 드높여 주는 것이 인촌 선생의 인품이자 경륜이었다”고 회고했다.

1960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급서한 야당 지도자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1894∼1960) 선생은 1958년 펴낸 회고록에서 “인촌 선생은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야당 시절 인촌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1993년 8월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

인촌은 특히 동아일보를 창간하면서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함’으로써 우리 겨레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는 민족의식 자체가 희박했다는 점에 비추어 인촌의 선각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또한 2000년 3월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며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고 말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인촌은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했다. 인촌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자 창씨개명 아이디어를 낸 총독부 학무국장이 직접 창씨개명을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인촌은 또 일제로부터 어떤 훈장이나 작위도 받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창간 이후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20년 동안 정간 4회, 발매금지 2000회 이상, 신문압수 89회, 기사삭제 연 2423회의 제재를 당했던 것도 ‘민족의 입’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고초였다.

▼투병 안창호선생 도와▼

간디가 보내온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의 편지.
인촌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도 해외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음양으로 지원했다.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1889∼1930)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강훈(李康勳·99) 전 광복회장은 인촌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91년 11월11일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에서 열린 인촌 동상 제막식에서 인촌의 독립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총칼로써 왜적 몇 사람을 해치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거대한 국력을 등에 업고 밀어닥치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다. (중략) 인촌 선생의 언론 교육 산업활동은 바로 독립의 길로 국민을 인도하는 독립자강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강훈옹의 회고는 계속된다.

“인촌께서는 1929년 말 구미 여행길에 상하이 임시정부에 들러 임정이 운영하던 학교에 큰 돈을 기부했다. 임정 요인들의 노고에 대한 인촌 선생의 진심어린 경의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1878∼1938)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크게 감동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正大) 스님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3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병원에서 투병 중일 때 가족들이 인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인촌은 남들 앞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했으나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을 전달했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도산은 “인촌이 따로 사람을 보내 많은 협조를 했어. 정말 인촌은 사려 깊은 사람이야”라고 측근을 통해 말한 바 있다.

이종찬(李鍾贊) 전 국가정보원장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선친 이규학(李圭鶴·1972년 별세) 선생에게 들었던 인촌의 대인(大人)다운 풍모를 소개했다.

“독립운동가였던 당숙 이규봉(李圭鳳) 선생이 귀국했지만 막상 할 일이 없었다. 이에 무작정 인촌을 찾아갔더니 ‘아무 소리 말고 일하라’며 동아일보 교열부에서 일하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박헌영(朴憲永)도 동아일보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처럼 인촌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일한 사람은 사상적 차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받아들인 인물이라고 선친께서 늘 말씀하셨다.”

서병조(徐丙(·80) 전 연합신문 편집부국장은 회고록 ‘정치사의 현장증언’(1981)에서 기자 시절 취재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한 독립단원이 인촌의 집에 찾아가 독립자금을 달라고 조르자 인촌은 신분을 확인한 뒤 사랑방에 있던 금고 문을 열어놓고 자리를 비켜줬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서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돈을 가져가도 좋다는 뜻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독립자금을 가져가 요긴하게 쓴 일이 있었다. 이때 인촌 집에 찾아갔던 사람은 바로 광복 후 제헌의회 의원을 지낸 장홍염(張洪琰) 의원이었다.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던 장 의원이 이 일화를 동료 의원들에게 뒤늦게 털어놓자 모두들 감탄했다.”

광복 직후 국회 반민특위에서 가려낸 친일인사 명단에 인촌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정치 경제 언론 교육분야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뿐만 아니라 이런 숨은 활동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서재필 “인촌은 대통령감”▼

1955년 2월 인촌의 빈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인촌은 일제 치하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광복 이후 조선’을 준비했다.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徐載弼·1866∼1951) 박사가 광복 후인 1947년 10월 고려대에서 강연했을 때의 일화. 한 학생이 서 박사에게 “초대 대통령감으로는 누구를 생각하느냐”고 묻자 서 박사는 빙그레 웃더니 “왜 멀리서 찾느냐”며 옆에 있는 인촌을 가리켰다. 그리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체포, 투옥되었던 독립투사들은 분명 애국자들이다. 그러나 인촌과 같이 국내에 남아 장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자신의 생을 바친 사람들 역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촌은 또 고려대 학생들에게 ‘전인적 인간’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완전한 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이 (완전한) 사람은 권리를 아는 동시에 의무를 알며 자유를 아는 동시에 책임을 알고 개인을 아는 동시에 사회를 알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까닭이다. (중략) 또 이 완전한 개인이란 자기가 자기를 결치(結治)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947년 11월3일 인촌이 고려대신문 창간호에 기고한 ‘민주주의는 자치를 기초로’ 중에서 고려대 인촌기념관 내 인촌상 뒤 현판에 기록된 내용)

▼독재정권에 단호히 저항▼

광복이 되자 인촌은 자유민주주의 원칙하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진력했다. 조선민족청년단장 등을 지낸 이범석(李範奭·1900∼1972) 초대 국무총리에 따르면 인촌은 해외 독립운동세력으로부터 건국을 같이 준비하고 싶은 국내 지도자로 손꼽혔다.

이범석은 자신이 주도한 1945년 8월20일 광복군의 국내 침투작전인 ‘독수리 계획’이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자 같은 해 8월18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귀국을 시도했다.

“우리는 (비행장을) 감시하는 헌병 중에 한국 사람을 발견하게 됐다. 그래서 한국 국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김성수씨 등에게 연락의 쪽지를 부탁하고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범석의 회고록 ‘우둥불’ 중)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자 인촌은 소련과 김일성(金日成)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이승만(李承晩·1875∼1965)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다. 좌우합작에 매달려 있다가는 남한마저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건국 후 이승만이 독재권력을 휘두르자 야당 육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6·25전쟁 와중인 1951년에는 부통령에 선출돼 초당적으로 나라를 지키기에 힘썼으나 1952년 집권 세력이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는 등 독재권력화하자 단호히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3선 개헌안을 사사오입 방식으로 통과시키기에 이르자 인촌은 병상에서도 야당의 단합과 투쟁을 역설했다.

1947년 중앙중 교사로 근무했던 김형석(金亨錫·82·철학)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근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1947년 당시 인촌이 이끌던 한국민주당은 이승만 박사와 대결할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려고 했다. 이에 모든 간부들이 ‘우리 당 안에서 후보가 나와야 하고 그렇다면 인촌 아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인촌은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1894∼1956) 선생을 모셔오라고 했다. 당원들은 ‘고생은 우리가 하고 왜 외부에서 영입하느냐’고 반발했지만 인촌은 ‘조금이라도 나은 인물을 모셔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100만명 몰려 ‘큰별’ 애도▼

인촌은 번영된 민족통일국가의 염원을 안은 채 1955년 2월18일 6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인촌이 별세하자 각계 각층 조문객들이 빈소에 운집했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100만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계동 사저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겨레의 ‘큰별’에 대한 국가원수의 마땅한 예우였다.

김차수기자 kcs@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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