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떠오르는 새 별]작곡가 조은화

  • 입력 2009년 6월 25일 02시 55분


“藝高시험 떨어져 코피 뚝뚝 흘렸죠”

우연히 멜로디 쓰다 작곡의 길로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첫 여성우승
“한국선 작곡가가 연주자 사야 공연
작품활동 도움된다면 어디든 갈것”

작곡가 조은화 씨(36)는 2월 벨기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의미는 컸다. 그 순간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퀸엘리자베스 콩쿠르가 개막한 1953년 이후 우승한 첫 한국인이자 작곡 부문의 첫 여성 우승자가 됐다.

우승 소식은 5월 22일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우승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아겐스(Agens·행위)’가 이 콩쿠르의 바이올린 부문 결선 과제곡이라서 보안을 위해 결선 진출자가 정해진 뒤 작곡 부문 우승자를 발표하기 때문이다. 아겐스는 조 씨가 2006년 독일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대학원 재학 때 만든 작품으로 2008년 콩쿠르에 출품했다. 결선에 오른 이들은 1주일간 이 곡을 연습해서 기량을 다퉜다.

클래식계에서 30대 작곡가는 ‘샛별’이다. 퀸엘리자베스는 바이올린 등 기악 부문의 출전 나이 제한은 27세 이하이지만 작곡 부문은 40세 이하다. 19일 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목소리를 전해온 조 씨는 “콩쿠르 우승을 부모님께서 더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데, 옆에서 보기엔 답답하셨겠죠. 생활도 불안정하고, 결혼도 안 하고…. 조금이나마 효도한 것 같아요.”

바이올린 콩쿠르가 열린 지난달 그는 3주간 브뤼셀에 머물렀다. 결선 진출자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일은 이 악보를 쓰는 것으로 다 끝났다. 각자 해석해라. 음악에는 정답이 없으니.”

바이올린 부문 우승자 레이 첸 씨(20)는 콩쿠르가 끝난 뒤 한 인터뷰에서 ‘아겐스’를 두고 “이렇게 기술적으로 어려운 곡을 어떻게 단 일주일 만에 익혀 결선 무대에 서라고 할 수 있나… 처음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고 녀석.’(웃음) 레이는 현대음악을 안 해 봐서 생소했나 봐요. 그는 중국계라 그런지 연주가 마치 중국말을 듣는 듯했죠. 반면 한국인 결선 진출자 4명의 연주엔 깜짝 놀랐답니다. 어떤 느낌으로 음악이 흘러가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어요. 한국인 작곡가의 곡에 담긴, 피할 수 없는 한국의 정서를 느꼈나 봐요.” 이 콩쿠르에서 김수연 씨가 4위를 차지했다.

조 씨가 작곡의 길에 들어선 건 ‘좌절’ 덕분이었다. 부산에서 자라 네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서울에서 예고 시험을 치렀다. 낙방 소식을 접한 순간,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부산에서 피아노 좀 치는 줄 알았는데, 떨어졌다니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이었죠. 부모님이 음악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설득하느라 애썼는데…. 부산여고에 진학해서 생각 많이 했죠. 음악은 꼭 하고 싶은데, 많은 시간 연습한 걸 짧은 시간에 무대에서 다 털어놔야 하는 건 싫더라고요. 우연히 멜로디를 써 봤는데 더 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울대 작곡과에 진학해 대학원까지 마친 뒤 한스아이슬러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한스아이슬러 작곡상, 바이마르 작곡상, 국제 몰리나리 현악4중주 작곡상, 부소니 작곡상 등 여러 콩쿠르에서 발군의 성적을 거뒀다. 200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다 다시 독일로 갔다.

“한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작곡가로서 경험을 더 쌓고 싶었습니다. 독일에서 사는 이유는 연주자들의 작품 의뢰가 많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선 작곡가가 연주자들을 ‘사서’ 무대에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큰 곡을 쓸 수가 없어요. 독일에선 가난해도 작곡할 수 있답니다.”

그는 올해 10월 프랑스 정부가 지원하는 ‘라 시테 데자르(국제예술공동체)’에 뽑혀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함께 머물며 교류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이다. “무용, 건축, 미술 등 다른 장르의 사람들과 만나 6개월간 어떻게 즐겁게 지내 볼까 기대가 많아요. 파리가 좋으면 거기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찾아볼 생각도 있고요. 작곡가는 어디에 살아도 상관없으니까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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