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웃음을 팔았지만 웃지 못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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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감로탱, 1868년, 사당패 공연 장면. 흥국사 제공
흥국사 감로탱, 1868년, 사당패 공연 장면. 흥국사 제공
“서울 이남에 무당 같으면서 무당이 아니고, 광대 같으면서 광대가 아니고, 비렁뱅이 같으면서 비렁뱅이가 아닌 자들이 있어 떼 지어 다니며 음란한 짓을 행한다.” ―이옥(李鈺) 전집

유랑하며 공연을 선보여 먹고사는 무리를 사당패라 불렀다. 사당패의 기원은 재승(才僧)이다. 재승은 승려로 사찰에서 열리는 불교 행사에 참여해 각종 연희를 선보였다. 재승 가운데 연예에 뛰어난 이들은 불경 간행, 법당 중수, 비석 건립 등에 쓰일 비용을 마련하려 절 안팎에서 공연을 했다. 원효 또한 파계한 이후 재승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애희로 중생을 교화했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 우란분재와 같은 불교 행사에서 여러 가지 연희를 선보였다. 불쌍한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 때 걸어두는 감로탱에는 사당패들의 연희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사당들은 무리를 지어 유랑하면서 연희로 돈을 벌었고 추워지면 본거지인 사찰로 돌아가 겨울을 나면서 기예를 연마했다. 안성의 남사당패와 청룡사의 관계는 유명하다. 이들은 어느 절에서 왔다는 사찰의 신표를 들고 다니며 연희를 보이고 부적을 팔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사찰로 모여들었고 사당패는 크게 늘었다. 선조 40년, 사헌부 상소에서는 “백성 태반이 떠돌아다니다가 도로에 줄을 잇고, 산골짜기에 가득합니다.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이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명색은 사당패이지만 오갈 데 없는 유랑민이었다. 사당패는 공연과 함께 매춘도 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사당패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이옥은 사람을 농락하며 온갖 꾀로 돈을 요구하는 저자들의 정체를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창고를 관리하는 자가 멀리해야 할 무리로 사당을 첫 번째로 꼽았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사당패를 줄이는 정책을 제안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당패는 본거지와 특기에 따라 다양한 유랑예인 집단으로 분화했다. 남자로 구성된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중심으로 농악 연주, 대접을 돌리는 묘기, 땅재주, 줄타기, 가면극, 꼭두각시를 선보였다. 또 집집마다 들러 장구를 치며 ‘고사소리’를 부르기도 했다. 굿중패는 승려가 직접 연희에 참여하여 꽹과리를 치고 염불을 외며 공연을 했다. 풍각쟁이패는 판소리, 퉁소, 북, 가야금, 해금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검무도 했다. 대광대패는 낙동강 일대에서 활동했고, 솟대쟁이패는 경상도 진양이 본거지였다. 솟대쟁이패는 1910년대 후반, 매일신보에 공연을 한다는 광고를 낼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들의 재주가 무형문화재로 인정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팔고 살았지만, 정작 자신은 웃을 일이 많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은 채 잘 걷지도 못한다거나, 얼굴에 딱지가 가득했다고 하니, 공연 중 발생한 사고나 성병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감로탱의 주인공이 된 것은 힘든 삶을 살아갔던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
#사당패#감로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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