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의 첫 집단학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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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역사학자 2인 신간서 고발

동학농민전쟁에 담긴 농민들의 슬픔과 분노를 형상화한 박생광의 그림 ‘전봉준’. 동아일보DB
동학농민전쟁에 담긴 농민들의 슬픔과 분노를 형상화한 박생광의 그림 ‘전봉준’. 동아일보DB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렬함을 요한다. 향후 모조리 살육할 것.’

1894년 10월 27일 오후 9시 30분 도쿄의 일본군 대본영이 인천 파병부대에 하달한 전신 명령이다. 이날 조선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2개 중대를 추가 파병해 달라는 전신을 도쿄에 보냈다. 상관인 외상을 건너뛰고 총리 이토 히로부미에게 직보할 정도로 다급했다. 다음 날 이토는 오히려 3개 중대로 파견 규모를 늘리면서 동학농민군의 재기가 불가능하도록 아예 싹을 잘라버리라는 ‘살육 지시’를 내린 것.

20여 년간 동학농민전쟁을 연구한 일본 역사학자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대 명예교수와 이노우에 가쓰오 홋카이도대 명예교수는 신간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모시는사람들·사진)에서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이 저지른 최초의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라고 규정했다. 우발적 충돌에 따른 살상이 아닌 철저히 계획된 ‘대량학살’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군 3개 중대는 세 방면에서 동학농민군을 포위해 한반도 서남부로 몰고 들어간 이른바 ‘3로 포위 섬멸작전’을 펼쳤다.

이들은 그 증거로 일본군 사이에서 오간 전신 명령뿐만 아니라 도쿠시마 현 출신 참전병사의 개인 일지까지 찾아냈다.

‘우리 부대는 서남 방면으로 추격해 농민군 48명을 죽이고 부상자 10명을 생포했다. 살아남은 포로는 고문한 다음 불에 태워 죽였다.’(1895년 1월 장흥)

‘동학당 7명을 잡아와 그들을 성 밖의 밭 가운데 일렬로 세우고 총에 검을 장착해 모리타 일등 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그들을 찔러 죽였다.’(1895년 1월 해남)

이 시기에 보수적으로 잡아도 동학농민군 3만∼5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역사학자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나 청나라군의 희생자 수를 넘어서는 규모라고 말한다.

두 역사학자는 동학농민전쟁이 또 하나의 청일전쟁이면서도 기억 속에서 철저히 잊혀졌다고 지적한다. 일본군은 특히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학은 민간의 저속한 미신’이라는 견해를 퍼뜨렸다.

하지만 이 같은 학살은 일본 군인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병사는 충북 옥천에서 쓴 일기에서 ‘60리에 걸쳐 민가에는 사람이 없었고 수백호가 불에 타 없어졌으며 많은 사체가 노상에 버려져 개와 새의 먹이가 되고 있다’며 ‘그날 밤 (동료를 만나) 지금까지의 고통스러움을 서로 이야기하는 데 수시간을 보냈다’고 적었다. 섬멸작전에 참가했던 한 일본군 대위는 작전 직후 경동맥을 끊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저자들은 이 학살의 최종 책임은 학살을 지시한 대본영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 등 최고지도자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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