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사도로, 때론 악의 화신으로…‘격투만화 5선’

  • 입력 2007년 3월 24일 05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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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KENTAROU MIURA/HAKUSEN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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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Izou Hashimoto/Akio Tanaka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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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부천만화정보센터
사진 제공 부천만화정보센터
《세상엔 양지와 음지가 있다. 밝고 건강한 광장과 어둡고 추한 습지. 한쪽만 존재하는 세상이란 없다. 만화나 영화 등 대중문화도 마찬가지다. 싸움이 난무하는 뒷골목이 그려지기도 하고, 착하고 평범한 우리 이웃의 모습을 담기도 한다. 그러나 두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갈라지진 않는다. 진흙탕에도 꽃은 피고 태양 아래에도 눈물이 있다. 치열하고 잔인한 격투 만화에도 인생을 음미하는 차 한 잔의 사유가 들어 있다. 숨가쁜 폭력 속에서도 문득 다가오는 한줌의 세상 이치를 만화에서 느껴보자.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운영하는 만화규장각(www.kcomics.net)의 콘텐츠 담당 백수진 씨와 깊이 있는 격투 만화를 골라봤다.》

○ 홀리랜드 (모리 코지/학산문화사)

고교생 유우는 학교와 집에서 전형적인 외톨이다. 답답함을 견디려 홀로 연습한 복싱. 자신을 방어하려고 거리의 건달과 싸우다 ‘불량배 싸움꾼’으로 거듭난다. 평범한 ‘왕따’가 영웅이 되는 얘기는 만화에선 식상한 소재. 그러나 홀리랜드(Holly Land·성지)는 과장이 넘치는 여타 만화와 다르다. 거품을 걷고 생생한 길거리 싸움의 현실을 보여 준다. 작가는 “희로애락 가운데 ‘노(怒)’의 본질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폭력 속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실제의 폭력은 무겁다. 승부의 희열이 있지만 그만큼 상처와 고통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삶을 배운다. 만화에서 홀리랜드란 그들만의 논리가 잣대가 되는 10대들의 길거리. 길거리 소년들이 어른과 아이의 틈새에서 겪는 성장통이 슬프다.

○ 바람의 파이터 (방학기/길찾기)

영화 ‘넘버3’에서 배우 송강호는 일갈한다. “황소 뿔을 작살내는 ‘무대뽀’ 정신.” 바람의 파이터는 송강호가 칭송해 마지않는 최고의 고수, 최배달(본명 최영의)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다. 끝없이 최고를 향해 정진하는 무도가의 일생.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실제의 격투신이 보는 이의 숨을 거칠게 만든다. 그 위에 초인이지만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의 삶이 담담하게 겹쳐진다. 최영의를 직접 인터뷰한 작가의 꼼꼼한 자료조사 노력이 빼곡히 담겨 있다. 그러나 바람의 파이터는 단순한 영웅 만화가 아니다. “그 역시 두려움을 아는 한 인간이다”는 명제로 시작해 화려한 격투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더 초점을 맞췄다. 권력을 향한 욕망과 진정한 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한국 격투만화의 자존심.

○ 베르세르크 (미우라 겐타로/대원씨아이)

때는 중세 어느 시절. 검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젊은 용병이 주인공이다. 숱한 전쟁 속에 인생을 배우며 친구와 연인을 얻는다. 그러나 가장 믿었던 이는 모두를 배신하고…. 절치부심 복수를 꿈꾸지만 사랑하는 여인도 지켜야 한다. 베르세르크는 작가의 수소폭탄급 데뷔작이다. 이노우에의 ‘슬램 덩크’를 보는 듯하다. 인간의 극한에 도전하는 주인공 가쓰의 인기는 강백호에 버금간다. 다만 슬램 덩크가 밝다면 베르세르크는 어둠의 극한까지 치달린다. 마초 만화의 요소를 충실히 따르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은 철학서를 방불케 한다. 인간의 본성, 선과 악의 경계, 심지어 종교까지도 아우르는 수준 높은 걸작. 판타지가 기본 설정이긴 하지만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건 아쉬운 점이다.

○ 군계 (하시모토 이조우·다나카 아키오/서울문화사)

군계는 위험하다. 소개하기도 꺼려진다. 거친 격투 묘사는 물론이고 설정이나 이야기 자체가 잔혹하다. “무엇을 봐도 정서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사람만 읽으라”는 충고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군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착한 주인공, 권선징악 등 기존의 관념이나 도덕은 벗어던진다. 잔인하도록 폭력적으로 타고난 주인공. 과연 인간의 천성은 선일까 악일까. 작가는 주인공과 폭력에 대한 판단을 끝까지 유보한다. 군계는 번역하면 ‘싸움닭’을 뜻하는 말. 뼛 속까지 싸움에 물든 사내들을 일컫는다. 치고받는 것만이 싸움은 아니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과도한 경쟁 역시 폭력의 또 다른 모습이다. 폭력도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일부라고 군계는 얘기한다. 19세 이상 구독가.

○ 씬 시티 (프랭크 밀러/세미콜론)

‘천재 악동’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에 브루스 윌리스, 제시카 알바 주연으로 유명해진 영화 ‘씬 시티’의 원작. 미국 만화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프랭크 밀러의 작품이다. 밀러는 1980년대 미국 만화의 새로운 조류인 ‘그래픽 노블(Graphic Noble)’의 중심 작가다. 그래픽 노블은 기존의 영웅 만화와 달리 작가 정신으로 무장한 만화 사조. 정치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과 번득이는 철학적 은유가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범죄 도시’라는 제목처럼 씬 시티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 순수함과 죄악은 언제나 뒤섞여 있다. 치열한 액션과 모험이 등장하지만 멋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만이 존재한다. “도망치지 않는 건 영웅이라서가 아니다”는 주인공의 독백이 가슴을 울린다. 한국과 일본의 격투 만화에 익숙하다면 또 다른 결을 지닌 미국 만화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 강렬한 흑백 대비가 인상적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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