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숨은 주역]<10·끝>영화배우 조재현 부인 김지숙

  • 입력 2004년 3월 19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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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재현의 부인 김지숙씨는 “배우의 아내로 16년을 살고서야 작품에서 남편을 배우로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전영한기자
배우 조재현의 부인 김지숙씨는 “배우의 아내로 16년을 살고서야 작품에서 남편을 배우로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전영한기자
“머리를 빡빡 깎고 인상도 험악한 남자가 불쑥 다가오더니 대뜸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너무 놀라 그러자고 했지만 약속 장소에 가지 않았죠.”

영화배우 조재현(39)과 부인 김지숙씨(39)의 첫 만남. 대학 동기인 두 사람은 1986년 부산 경성대 캠퍼스에서 조재현이 주연한 영화 ‘나쁜 남자’의 한 장면처럼 만났다. 조재현은 당시 연극 ‘아일랜드’에 출연하느라 빡빡머리 상태였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연극을 봤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미치도록 열심히 하는 남자라는 결론을 내렸죠.”

2년 뒤인 88년 김씨는 ‘나쁜 남자’처럼 보였던 배우 지망생과 결혼했다. 그 지망생은 이제 대표적 연기파라는 평가를 받는, ‘좋은 배우’가 됐다.

최근 남편이 공연한 연극 ‘에쿠우스’는 배우의 아내로 16년을 살아온 김씨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조재현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17세 앨런 역에 도전했고 노출도 많았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남편이 노출이 많은 작품이나 베드신은 안 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죠. ‘에쿠우스’에서 전라(全裸) 상태의 여배우와 살이 맞닿는 장면이 있어 꺼림칙했습니다.”

하지만 김씨는 남편의 연기에 푹 빠져 앨런을 남편이 아닌 배우로 다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남편이기 때문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아 올해 ‘에쿠우스’를 일곱 차례나 봤다.

지금은 남편의 이름 석자만으로 세상이 알아주지만 예전엔 ‘어떤 드라마의 어떤 역으로 나왔다’고 길게 설명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연극을 하면서 돈이 궁했던 남편은 아들 수훈의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통장을 들고 갔다. 집안 어른들이 아이에게 용돈으로 준 돈을 한푼 두푼 모아놓은 통장이었다.

“40만원이었지요. 그 통장을 가져갈 때는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어떤 돈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걸 들고 가는 재현씨 속내는 어땠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배우의 아내가 할 일은 남편이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켜보고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짓궂은 질문이지만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있느냐고 물었다. 가정적이라는 이유로 조재현의 모델이 되길 바라는 안성기와 “그냥 좋다”는 권상우의 이름이 나왔다. 옆에서 듣던 조재현의 반격.

“권상우씨랑 만나 같이 밥까지 먹게 해줬어요. 배우에게 그런 부탁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아십니까.”

김씨는 남편을 복잡한 캐릭터라고 했다.

“일단 조재현은 태어날 때부터 배우로 태어난 사람, 배우밖에는 할 게 없는 사람이에요. 얼굴도 묘해요. 이쪽에서 보면 착하고, 저쪽에서 보면 악하고. 싸움이라도 한번 하고 나면 정말 나쁘고 독한 남자예요.” (웃음)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아내에게 바치는 조재현의 e메일

“당신은 나의 참 좋은 친구요….”

연극 ‘좋은 녀석들’ 속의 대사야. 이번 ‘에쿠우스’ 부산 공연에 부모님과 우리 가족이 동행하면서 생각난 대사가 하나 더 있어. “당신은 우리들의 참 좋은 친구”라고. 어린 나이에 시집와 귀염 받던 며느리가 형의 사고로 큰며느리가 되어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챙기느라….

이젠 나에게도, 집안에도 ‘작은 거인’ 며느리가 돼 버린 그대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소.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 수훈이와 혜정이를 보며 착하게 잘 키웠다고 했을 때가 가장 흐뭇했다는 당신의 말에 덩달아 기분 좋은 마음 한편으론 쓸쓸함이 스쳤어. 한때는 꿈 많고 얼굴도 예뻤던 여대생이 이제는 자신의 행복을 자식에게서 얻는 대한민국의 어머니가 되었다니. 나는 끝없이 나의 길을 가고만 있는데….

올봄은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내리다. 아니 당신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리다. 얼마 전 ‘에쿠우스’ 공연에서 “내 인생의 단 한 명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와 여행을 가고 싶다”는 다이사트 박사의 대사가 있었어. 난 최소한 한 명을 확보해 놓았지. 우리가 몇 년 전 베네치아에 여행 갔을 때 노을 속에서 노부부가 과자를 먹으면서 나란히 손잡고 가던 모습 기억나? 젊은 남녀의 뜨거운 키스보다 더 아름다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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