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천재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 입력 2003년 6월 19일 18시 10분


코멘트
고교와 대학을 거치며 서로의 성장과정을 지켜봐온 동창생인 한린, 오성환, 구제린(왼쪽부터). “창의적인 아이들을 함께 모아 놓기만해도 서로를 자극해 시너지가 생긴다”고 말한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고교와 대학을 거치며 서로의 성장과정을 지켜봐온 동창생인 한린, 오성환, 구제린(왼쪽부터). “창의적인 아이들을 함께 모아 놓기만해도 서로를 자극해 시너지가 생긴다”고 말한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토요일 오후, 캠퍼스는 분주했다. 14일은 미적분학을 수강하는 서울대 학부생 2000여명이 동시에 기말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구제린(22· 수학과 2000학번) 오성환(22· 화학과 2000학번) 한린(22·수학과 대학원 1학기)도 중앙도서관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는 학생들 속에 있었다.

세 사람은 서울과학고 97년 입학 동기. 고교 입학 후 줄곧 소리쳐 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 머물며 성장해온 이들은 올여름 낯선 땅에서 ‘따로 또 같이’ 삶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한다.

하버드대 의대 대학원 생명과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성환이 28일 출국하는 것을 시작으로 MIT 대학원 수학과에 입학허가를 받은 제린은 8월 8일, 하버드대 대학원 수학과에 가는 린이 같은 달 1일 각각 미국 보스턴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

올여름 세계 각국 명문대로 유학을 떠나는 한국 청년이 이들만은 아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한국사회 영재교육 시스템의 일부로 만들어진 과학고의 교육을 체험했고 각국 두뇌들이 경쟁하는 국제올림피아드에 참가해 수상했으며 서울대를 조기졸업해 전공분야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가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최근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한 사람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살리는 시대’를 주장하며 천재의 국가적 육성을 제안했다. 한국사회의 천재 혹은 영재들은 어떻게 성장하고 있을까.

●이건희 회장의 '천재 육성론'

제린과 린이 서로의 존재를 안 것은 초등학교 시절. 서울 둔촌동과 신문로에서 자라 일면식도 없었지만 “수학경시대회에 진짜 잘하는 애가 나왔더라”는 서로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였다. 과학고에 입학한 린과 제린이 ‘한국팀’으로 루마니아 수학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딴 99년, 성환은 태국에서 열린 화학올림피아드의 금메달 수상자였다.

“러시아나 미국 아이들은 도형 같은 창조적인 문제를 푸는 데 강했고 중국 애들은 쉬운 문제를 풀 땐 천편일률의 답을 내놓는 것 같지만 진짜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면 각양각색으로 방법을 찾아내는 저력이 있었어. 한국 애들은 목표가 있을 때 밀어붙이는 힘이 좋지. 문제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풀어가는….” (제린, 린)

“화학분야에선 한국 출전자들은 이론시험에서는 모두 100점에 95점 이상을 받아. 메달 색깔을 가르는 건 실험결과였어. 그 점에서 난 과학고 덕을 봤지. 매년 선생님들이 실험실 운영계획을 짜며 올해는 또 얘들이 뭘 하겠다고 덤빌까 전전긍긍하시던 것 생각나니? 그래도 우리가 뭘 실험하겠다고 하든 말리시는 일은 없었잖아. 밤새워 실험을 하든 어쩌든….”(성환)

98년 대입전형에서 과학고에 부여되던 ‘비교내신’이 폐지됐다. 2학년 가을 180명 동급생 중 80명이 내신 때문에 학교를 떠났다. 나머지 40명은 2학년을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진학했다. 올림피아드 수상 덕분에 학교장 추천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세 사람은 학교에 남았다. 교실 분위기는 뒤숭숭했지만 그래도 세 사람은 행복했다. 최소한 과학고에서는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넌 왜 그런 게 궁금하니?”라고 뜨악한 눈초리를 보내는 친구나 선생님들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럴 만했다.

고교 입학 후 세 사람이 터득한 생활 지침 1조는 ‘세 자리 숫자 등수 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였다. ‘세상에 나보다 잘난 아이들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지만 그것이 꼭 열등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좋은 의미에서 ‘잘난 티’내는 친구들이 많았던 게 축복이었지. 누구든 자기가 아는 걸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는 데 열심이었고 궁금증을 가진 아이들도 그만큼 열성적으로 들었잖아. 선생님들은 일정 한계를 넘으면 더 이상 가르치려 하지 않고 우리들한테 맡겨 두셨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도록 말이야.” (성환)

“난 공부하는 자세의 기본을 고교 시절에 다진 것 같아. 풀리지 않는 어떤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 문제가 만들어진 전체상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건 그걸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일순간에 깨달을 수 있어. 대학에서도 교수님들, 선배들과 그런 토론 경험을 많이 했지만 시작은 고교 시절 친구들하고였어. 수학은 펜하고 종이만 갖고 고립돼서 하는 작업이 아니란 걸 안 출발점이지.” (제린)

제린과 린은 고교 입학 전까지 영재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린은 “남에게 배운다거나 학원 다니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환경이 오히려 내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성환은 초등학교 입학 무렵 1년여 영재교육을 받았지만 그에 관해 별 기억이 없다. 중학 시절 측정한 것으로 린의 지능지수(IQ)는 165, 제린과 성환은 150. 해마다 ‘측정불능’의 IQ가 나온다는 과학고에서는 특별한 수준은 아니었다.

입학 때 비슷해 보였던 친구들은 오래지 않아 ‘깎인 보석과 깎이지 않은 원석(原石)’으로 구별됐다. 온갖 과외학습으로 ‘만들어진’ 수재도 입학했지만, 과학고에 들어온 뒤 뛰어난 친구들과 부딪치며 비로소 다듬어지기 시작한 원석도 있었다. 세공이 끝난 보석과 원석의 가능성은 그 차원이 달랐다.

“어떤 커리큘럼보다도 뛰어난 애들을 모아놓고 자유롭게 공부하도록 풀어놓으면 그것만으로도 핵반응이 일어나요. 하지만 핵반응이 일어나려면 일정 임계량이 넘어가야 하죠.”(성환)

린은 서울대에서 3년 만에 수학, 물리 복수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마쳤다. 제린과 성환은 3년1학기째에 졸업한다. 하는 제린과 성환이 마지막 기말시험을 치를 때 대학원생으로서 시험감독과 채점을 했다. 세 친구는 모두 학부생으로서 대학원 강의를 들었다. 성환은 고교 3년 때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에서 석사과정생 1명과 자신이 기획한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국제 올림피아드의 멘토로 성환을 지켜본 화학과 김희준 교수의 배려 덕분이었다.

●학점귀신 vs 르네상스적 호기심

학부 3년간 린은 전국 대학생 수학경시대회 최우수상을 3연패했다.

“‘기린아 린(麟)’이 성적 관리는 잘 못 해서 자연대 수석을 놓쳤지. 겨우 수학과 물리학과 과수석밖에 못하고 말야.(웃음)”(제린)

“제린이도 성적이 나빠서 평점 4.3점 만점에 4.0점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니?(웃음) 하기야 반올림해서 4.3이 되는 학점귀신들도 있으니….”(성환)

“양궁에서 B가 나와서 그래. 그래도 사진 골프 스케이트 스키 수업이 다 너무 재미있지 않았니?”(제린)

제린은 “남학생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성환)에 활달하고 운동을 좋아한다. 고교시절 주역 강의를 들으러 다녔던 린은 ‘스타크래프트’ 도사다. 실력을 아는 친구들이 “유학 가기 전까지 남는 시간 동안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게 어떠냐”고 진지하게 권했을 정도다.

서울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와 회장을 지낸 성환은 음대에서만 일곱 강좌를 들었다. 오페라사, 서양음악사는 물론이고 전공학생들이 듣는 ‘시창청음’ 같은 과목에서도 A학점을 받았다. 어려서 한문 원전을 배웠던 즐거움을 되새겨보려 중문과의 고전 강독도 수강했다. 그런 강의에선 첫 시간이면 출석부를 훑어 내려가던 교수가 으레 “오성환, 화학과 맞아?”라고 불러 세우곤 했다.

“관심 갖는 일이 많다는 건 슬럼프에 빠졌을 때 도움이 되잖아.”(성환)

‘알고 싶다’는 욕구는 결코 전공공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세 친구는 잘 알고 있다.

●사회적 긴장감을 가진 과학자

제린, 성환, 린 모두 하버드와 매사추세츠 공과대에서 장학금을 약속받았다. 대학 시절 내내 등록금보다 더 많은 장학금을 학교 안팎에서 받았다. 고교 때는 국가지원으로 대학보다 더 좋은 실험실 기자재들을 사용하며 공부했다. ‘머리가 좋다’는 점 때문에 남다른 대우를 받아온 데 대해 느끼는 사회적 책임감은 없을까.

“사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나만 하는 생각도 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기 위해 오랜 시간을 바친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의 용기나 투지는 그 공식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려서 여자애들이 소수라는 위축감 때문에 수학경시대회에서 포기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 여자아이들이 과학을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게 내 몫은 아닐까.”(제린)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받은 라이너스 폴링을 종종 떠올려. 반핵운동 경력 때문에 영국 입국을 취소당해 DNA나선구조를 밝힐 결정적인 자료를 못 보았지. 과학적 대 발견을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맞바꾼 것인데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위해 과학자로서의 영광을 포기한 건데…. 당연한 얘기지만 과학자는 사회구조 속에서 존재한다는 긴장을 생각해.”(성환)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장학금은 큰 도움이었어. 만약 돈을 번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아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더라도 나도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서…. 내 꿈은 어떤 문제가 되어도 좋으니 수학에 있어서 미해결 문제라 불리는 걸 단 한 문제라도 해결하는 거야.”(린)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천재를 가려내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두뇌가 비범한 사람을 일컫는 단어인 ‘천재(天才)’ ‘신동(神童)’. 그러나 교육전문가들은 ‘천재’라는 단어의 사용을 꺼린다. 대신 ‘영재(英才)’라고 지칭한다.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연구원의 조석희 박사는 “천재라는 말 속에는 천부적인 자질을 교육하지 않고 방치해 두어도 잘 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면, 영재는 타고난 재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계속적인 교육을 통해 개발되는 것이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구별했다. 영재 위에 천재가 있다는 식의 등급구분은 오해다.

영재교육 전문가들은 “영재는 상대적으로 판별된다”고 설명한다. 과학분야는 물론이고 직관으로 천재성이 확인될 것 같은 예술 분야에서도 “이 아이가 저 아이보다 낫다”는 상대 비교는 가능해도, “이 점수 이상은 천재”라는 기준 설정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영재를 가려내는 방법은 ‘피라미드 모델’이다. 광범위한 집단부터 ‘상위 1%’를 골라내 추려낸 사람들 안에서 다시 1%를 골라내는 식으로 압축해 간다.

무엇이 가장 빼어난 영재적인 면모인가에 대한 최근의 합의는 ‘문제 자체를 스스로 설정해내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문제를 주었을 때 해답을 찾는 것이 가장 낮은 단계이고 해답을 얻기까지의 방법을 체계화하는 것이 그 위 단계라면 아예 문제를 고안해 내는 것이 가장 뛰어난 능력이라는 것. 미국의 인텔과학재능발굴(Intel Science Talent Search) 등 최근의 영재선발대회는 모두 암기나 반복학습 등으로 길러지지 않는 ‘현상에서 문제를 찾아내는 능력’을 측정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