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바둑세상만사]실리냐 세력이냐

  • 입력 2000년 9월 4일 11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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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세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력을 멋있게 만들어 놓고도 집이 되질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다 보니 세력을 쓸모 없는 것 정도로 치부하기가 쉽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세력은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이 아닌데 그곳에다 집을 만들려 한 것이니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세력이 쓸모 없는 허장성세인 것은 아니다. 세력은 오히려 아주 무서운, 경계해야 할 그 무엇이다. 바둑 기리에 '상대 세력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세력의 무서움을 암시하는 경고장이다. 문제는 세력의 운용이다. 그런데 이 운용이 아주 어려워서, 아마추어 중급 수준 이상이 되어야 세력을 어느 정도 활용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실리는 눈 앞의 이익이다. 현금과 같다. 반면 세력은 먼 훗날을 대비한 저금이다. 보험과 같다. 현금과 보험을 적당 비율로 나누어 가진다면 이상적이지만 바둑이 항상 마음 먹은대로 되지는 않는다. 한쪽이 실리를 밝히면 상대는 본의 아니게 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세를 만들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손은 실리 쪽으로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실리를 밝히는 사람은 당장 재산은 많지만 주위로부터 따돌림 당하기 쉽다. 잘 나갈 때는 문제 없지만 혹 잘못돼면 누군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실리만 챙기다 혹 중앙에 곤마라도 생기면 원군을 구경하기 힘든 것과 똑 같다. 어려움이 닥치면 모두 외면하는 것이다.

세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당장 가진 것은 없지만 주위의 믿음이 든든하다. 어디를 가더라도 외롭지 않다. 그러나 이 신망이 곧바로 재산은 아니다. 이를 잘 활용해서 재산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잘 되면 대부호가 되지만 실패하면 껍데기만 남는다.

실리바둑을 현실파라고 한다면 세력 바둑은 낭만파다. 아마추어 바둑팬들은 대체로 낭만파 바둑을 더 좋아한다. 실리바둑이 야박스럽고 답답한데 비해 세력바둑은 멋있어 보이고 시원시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국수로 불리는 김인 9단의 바둑은 무척 두터웠다. 바둑 만큼이나 인품도 두터운 것 으로 소문나 그를 좋아하던 팬들이 많았다.

극단적인 세력바둑 인기를 끌었던 사람으로는 일본의 다께미야 마사끼 9단이 있다. 그는 대세력 바둑으로 후지쓰배 세계바둑대회 초대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세력바둑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대바둑에서 소목보다는 화점, 3선 보다는 4선, 귀 보다는 중앙을 좀 더 중요시하게 된 데에는 그의 영향이 무척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바둑은 집이 많아야 하므로 실리를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실리가 많으면 왠지 든든하다. 그러나 집만 챙기다보면 두터움을 잃어 고전한다.

그렇다고 세력만 만들다보면 집부족증에 걸린다. 세력은 집이 아니므로 이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아야 하는데 그 '운용의 노우하우'가 어렵다. 실리와 세력은 바둑의 갈림길이면서 인생의 영원한 딜레마다.

요즘 특히 젊은 프로기사들은 실리 위주의 바둑을 둔다. 대범한 세력바둑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눈 앞의 이익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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