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민화의 세계]까치호랑이 그림, 우스꽝스러운 권력자… 기세등등한 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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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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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호랑이’, 신재현, 1934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드디어 화해를 한 호랑이와 까치.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득하다(왼쪽), 제주 용눈이 오름 까치호랑이’, 19세기, 일본민예관 소장. 그림 속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른다. 호랑이는 눈에 노란 불을 켜고 붉은 입을 벌린 채 구석에 있는 까치를 가차 없이 몰아세운다. 까치는 이에 질세라 한껏 부리를 벌리고 꼬리를 높이 세우며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오른쪽).
까치호랑이’, 신재현, 1934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드디어 화해를 한 호랑이와 까치.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득하다(왼쪽), 제주 용눈이 오름 까치호랑이’, 19세기, 일본민예관 소장. 그림 속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른다. 호랑이는 눈에 노란 불을 켜고 붉은 입을 벌린 채 구석에 있는 까치를 가차 없이 몰아세운다. 까치는 이에 질세라 한껏 부리를 벌리고 꼬리를 높이 세우며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오른쪽).
중국엔 ‘조선 사람들은 일생의 반을 호랑이에게 물려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데 보내고 나머지 반은 호환(虎患)을 당한 사람 집에 조문을 가는 데 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의 2가 산이어서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호환도 다반사였다. 이와 비례해 호랑이와 관련한 이야기와 문화가 발달했다.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의 나라(虎談國·호담국)’라고 부르기도 했다. 호랑이에 대한 우리의 유난한 애증은 현대에도 이어져 호돌이를 88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내세우는 데까지 이르렀다.

호랑이와 까치, 다윗과 골리앗


민화 쪽에서도 호랑이 그림, 특히 까치호랑이 그림의 인기가 매우 높다. 한국적인 특색을 강하게 나타낸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까치와 호랑이가 짝을 이루는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그 원류는 임진왜란 때 우리 땅에 전해진 ‘유호도(乳虎圖)’ 또는 ‘자모호도(子母虎圖)’란 명나라 그림(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돌보는 모습을 표현)이다. 명나라식 까치호랑이는 이후 꾸준히 한국화됐다. 급기야 19세기 민화에서는 그 뿌리를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호랑이 그림으로 자리 잡았다.

까치호랑이 그림에서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길상(吉祥)의 상징이고 호랑이는 액을 막아주는 벽사(邪)의 상징이다. 호랑이 대신 표범이 등장하기도 한다. 표범 표(豹)자의 중국어 발음(바오)은 알린다는 뜻의 보(報)자와 같다. 까치는 기쁨(喜)을 뜻하므로 까치표범 그림은 보희(報喜), 즉 기쁨을 전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까치호랑이 민화는 단순히 길상과 벽사의 상징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는 풍자를 원래의 상징에 덧붙였다. 이런 까치호랑이 그림에선 무서워야 할 호랑이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작은 까치가 기세등등하게 등장한다. 호랑이들은 백수의 왕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사팔뜨기 호랑이, 고양이 같은 호랑이, 담배 피우는 호랑이, 거세된 호랑이, 까치의 눈치를 살피는 호랑이 등 얼빠지고 우스꽝스러운 ‘바보호랑이’ 등 종류도 많다.

여기서 호랑이는 권력을 내세워 폭정을 자행하는 관리를 상징하고 까치는 힘없는 서민을 대표한다. 사회에 대한 비판, 특히 지배계층의 푸대접에 대한 불만이 민화 속에 우화적이고 해학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런 그림에는 권위적인 존재를 자신들과 같이 평범한 존재로 격하시키려는 서민의 평등의식이 담겨 있다. 실제로 까치는 더욱 당당해져 호랑이에게 대들거나 호랑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기도 한다. 만일 호랑이가 덤비면 까치는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고 보면 민화 까치호랑이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호랑이가 아니라 까치라고 볼 수도 있다. 호랑이 그림에서 까치가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은 민화 속에서만 가능한 역설이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르네상스시대 서양에서도 어린 소년 다윗과 거인 장군 골리앗의 싸움을 담은 그림이 가톨릭의 권위에 대항하는 신교도(프로테스탄트)의 상징으로 인기를 끌었다.

까치의 꿈은 무엇일까


1930년대에 그려진 신재현의 까치호랑이(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에서 호랑이와 까치는 드디어 첨예한 대립에서 벗어나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선다. 그림 속 까치와 호랑이는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하다. 그림 위쪽 가운데에 씌어 있는 ‘호랑이가 남산에서 부르짖으니 까치들이 모두 모여들다(虎嘯南山 群鵲都會·호소남산 군작도회)’란 문구가 이 그림의 분위기를 전한다. 어미 호랑이는 예쁘게 속눈썹을 치장하고 밝게 웃고 있고 발톱은 솜방망이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이 덕분에 까치들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긴장을 풀고 호랑이의 초대에 흔쾌히 응하고 있다. 그림 전체가 밝고 명랑한 정서로 가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재현의 그림 속 호랑이는 권위로 지배하기보다 백성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누는 지도자를 상징한다. 이런 지도자를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높은 것은 깎아내리고 낮은 곳은 돋워서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 이야말로 호랑이 민화에 깃들어 있는 까치의 꿈일 것이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 chongpm@gju.ac.kr  
:: 정병모는… ::

‘민화를 세계로’란 목표로 세계 각국에 소장된 우리의 민화와 외국의 민화를 조사하고 있다. ‘반갑다 우리민화전’(서울역사박물관), ‘행복이 가득한 그림, 민화전’(부산박물관), ‘중국민화전’(가회민화박물관 조선민화박물관)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여러 국제 민화 세미나에서 조언하기도 했다.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시와 경북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저서로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Korean Art Book-회화’ ‘사계절의 생활풍속’ ‘한국의 풍속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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