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굴비’의 귀향…박명자씨 박수근미술관에 55점 기증

  • 입력 2004년 4월 18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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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작 ‘굴비’는 3호짜리의 작은 정물화지만 소박한 구도와 중후한 색상 표현으로 박수근의 서민적 회화감을 잘 나타낸 명작으로 꼽힌다.
1962년 작 ‘굴비’는 3호짜리의 작은 정물화지만 소박한 구도와 중후한 색상 표현으로 박수근의 서민적 회화감을 잘 나타낸 명작으로 꼽힌다.
강원도 양구 가는 길은 봄이 지천이었다. 산벚꽃, 개나리, 진달래로 흐드러진 산천과 파릇파릇한 새순은 발그레한 새색시처럼 수줍어 보이면서도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돌아온 전사(戰士)처럼 당당해 보였다.

군부대를 지나 띄엄띄엄 인가가 보이는 정림리로 들어서니 2개 동의 군인 아파트 앞에 불쑥 현대식 건물이 나타났다. 2002년 10월 박수근 화백(1914∼1965년) 생가 터에 들어선 박수근미술관이다. 산자락을 그대로 이어 성벽처럼 작은 돌을 차근차근 쌓아올린 진입로 벽이 특이했다. 박수근 캔버스 특유의 거친 질감을 돌 벽으로 재현했다고 동행한 이 미술관 유홍준 명예관장이 소개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부산하다. 이날(15일)은 마침, 경기도 포천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던 박 화백의 묘를 이장(移葬)하는 날. 박 화백은 양구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에 고향을 떠난 뒤 타지에서 쉰 한 살에 숨을 거뒀으니 70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와 영면하는 셈이다. 생전에 금슬 좋기로 유명했던 아내 김복순씨의 묘도 함께 이장됐다. 미술관 뒷동산으로 옮겨진 부부의 묘를 보니 명실상부하게 박수근의 혼과 그림이 하나 되는 듯했다.

박 화백의 아들 성남씨, 딸 인숙씨와 함께 박수근미술관 내부를 둘러 보고 있는 갤러리 현대 박명자 사장(맨 오른쪽).

이날 행사에는 유족인 장녀 인숙씨(60·인천여중 교장)와 장남 성남씨(57·호주 거주)를 비롯해 임경순 양구군수, 박수근미술관 건립에 산파 역할을 했던 강원도 출신의 한지(韓紙)작가 함섭, 서양화가 김한국씨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모두의 얼굴에서 할 일을 마쳤다는 뿌듯함과 개운함이 묻어났지만 이들 중 갤러리 현대 박명자 대표의 감회가 남달라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인 반도화랑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박 화백이 숨질 때까지 교분을 유지했던 그녀는 이번 이장을 기념해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박수근의 대표 유화작품을 비롯해 동시대 쟁쟁한 화가들의 주옥같은 작품을 55점이나 기증했다.

박 대표는 “1961년 처음 인연을 맺은 박 화백은 기량도 뛰어났지만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인정이 많아 내가 지금까지 만난 화가들 중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며 “2년 전 문을 연 미술관이 임 군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지역미술관의 모범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데 한 몫 보태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기증작들은 묘 이전을 기리기 위해 24∼8월31일 열리는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이란 제목의 전시에서 선보인다.

1959년 부인 김복순 여사, 막내딸 인애와 함께 창신동 마루에 앉아 있는 박수근 화백.

미술관 측은 이 전시를 위해 디스플레이를 마치고 막바지 준비작업에 한창이었다. 유족들이 박 대표가 기증한 유화 ‘굴비(1962년)’ 앞에 나란히 섰다. 굴비 두 마리를 그린 이 작품은 가로 29cm×세로 15.5cm(3호 크기)의 작은 정물화지만 소박한 구도, 단순 명쾌한 사실적 묘사, 중후한 색상 표현 등으로 박수근의 서민적 회화감을 잘 드러낸 명작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이걸 그리던 모습이 생생해요. 어머니가 ‘식당에 걸어 놓으면 사람들이 진짜 굴비인 줄 알겠다’고 농담을 해 식구들이 깔깔거리며 웃었지요.” (큰 딸 인숙씨)

“70년대 유작 전을 할 때 구입해 소장해 왔어요. 이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박 화백을 추억할 수 있게 돼 기쁩니다.” (박대표)

미술관 뒷동산에 새로 조성된 박수근 묘에서 내려다 본 박수근 미술관 전경.

이번 기증작들은 ‘굴비’를 포함해 1950년대의 드로잉인 ‘독장수’ ‘시장’ 등 박수근의 작품 3점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구본웅 김기창 김상유 김환기 김흥수 도상봉 문신 박래현 서세옥 이응노 이중섭 장욱진 등 36명의 작품 52점이다. 유화, 한국화, 수채화, 드로잉 등으로 장르도 다양하며 시대도 1950∼80년대에 고루 걸쳐 있다.

이번 기증으로 박수근미술관은 ‘빈 수레’(컬렉터 조재진씨 기증)와 ‘앉아있는 두 남자’(미술관 구입)를 포함해 박수근 유화 3점을 소장하게 됐다. 이밖에 미술관에는 고인이 생전에 쓰던 수채화 ‘화구(畵具)’를 비롯해 판화 13점, 목판원판 7점, 스케치 70점, 111컷이 담겨 있는 삽화 첩 1권, 크레파스화 1점 등도 소장돼 있다. 033-480-2655

양구=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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