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꽃을 잡고’… 기생, 시대를 앞서간 슬픈 영혼

  • 입력 2005년 6월 4일 0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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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잡고/신현규 지음/299쪽·1만7000원·경덕

‘오직 기생 세계에는 타인 교제의 충분한 경험으로 인물을 선택할 만한 판단의 힘이 있고 여러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을 좋아할 만한 기회가 있으므로… 조선여자로서 진정의 사랑을 할 줄 알고 줄 줄 아는 자는 기생계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이 1923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에 한 기생의 자살을 두고 쓴 글이다. 그 기생의 이름은 ‘강명화’. 미모와 재능이 뛰어나 서울 장안의 웬만한 풍류객치고 모르는 이가 없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몸은 비록 기적(妓籍)에 있었으나 당시 여성으로는 드문 ‘사랑지상주의자’였다고 한다. 마침내 거상(巨商)의 아들과 인연이 되었으나 남자 집안의 반대로 일본 도피를 하다 결국 스물셋에 자살한다. 남자도 따라 죽는다.

나혜석은 ‘강명화의 자살’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는데 당신은 나와 살면 가족도 세상도 모두 외면합니다’는 강명화의 유언을 인용하며 추모했다.

한국 고전문학 전공인 신현규(40)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가 쓴 ‘꽃을 잡고’에는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파란만장한 기생들의 삶이 상세한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되어 있다. 강명화를 비롯한 기생 80여 명의 삶이 사랑, 재능(노래 춤), 성공, 좌절 등의 코드로 실감나게 소개된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기생 이야기만은 아니다. 시대를 달리한 여성들의 이야기이며, 억압이 많았던 시절, 자유를 꿈꾸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저자가 기생의 삶을 전문직을 가진 예인(藝人)이라는 시각으로,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라는 앵글로 보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는 추천사에서 “‘기생’은 근대화, 여성사, 식민주의, 젠더, 계급 등의 문제들이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있는 주제”라며 ‘사회과학적 안목으로 분석한 이 책은 근대 여성사 연구의 일대 획을 긋는 작업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수록된 사진, 엽서 등은 수집 전문가 이종호 씨가 제공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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