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내 안의 사이코]겉따로 속따로 "당신도 혹시…"

  • 입력 2003년 9월 18일 16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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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사이코’를 찾는 심층검사에 응한 20∼40대 남녀 5명은 모두 정신 병력이 전혀 없고 비교적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검사는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상황들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하는 566문항의 다면적 인성검사 △좌우 대칭의 물감 얼룩을 보고 어떤 물체 또는 상황으로 보이는지 물어보는 로샤검사 △사진이나 그림 속 상황을 설명하게 하는 주제통각검사 등 7가지 테스트로 진행됐다. 검사와 분석, 상담은 서울 동작구 사당동 마음누리신경정신과 전문의 정찬호씨와 임상심리사 3인이 맡았다.》

▼쾌활하지만 실제론 대인관계 두려워 ▼

●좋은 여자 컴플렉스

A씨(34·유통업체 과장·여)는 칭찬을 많이 해주는 부모 밑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다. 결혼 생활도 원만한 편. 친척 동생들이 워낙 예뻐서 자신은 못생겼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 사랑을 받았다. 중간관리자로 올라서면서 상사와 후배 모두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겉으로는 쾌활하지만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이 자주 든다.

다소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남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일. 가장 부러운 사람은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히는 사람. 스트레스가 많아지면서 쇼핑이 부쩍 늘었다.

A씨가 테스트 받은 그림1.

직장과 관련해 가장 큰 스트레스는 “말을 잘 해야 하고, 프레젠테이션을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스스로 ‘설득적 커뮤니케이션’에 약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A씨에게 사람, 나무, 집을 그리라고 주문했다. 그가 그린 작은 집은 세모 모양의 지붕과 격자무늬 창살의 창문, 손잡이가 없는 문이 있었다. 집 주변에는 나무 일곱 그루가 있고 집 앞에 냇물이 흐른다. 얼굴이 동그랗고 생선 가시 같은 몸을 가진 사람들도 그렸다.

울창한 나무가 있는 자연은 “스트레스가 많아 쉬고 싶다”는 표현이며 손잡이가 없는 문과 창살 달린 창문, 사람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은 마음을 잘 열지 못하고 있다는 뜻. “현재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의미”라고 임상심리사는 설명했다.

주제통각검사에서 A씨는 바이올린을 앞에 두고 턱을 괸 남자 아이를 보고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린을 고장 내서 혼날까봐 고민하고 있어요. 거짓말은 하기 싫고, 아이 잘못도 아닌데….” (그림 ①)

―혼나는 게 겁이 나나요?

“상처를 심하게 받고 오래가는 편이에요. 회사에선 실수는 곧 무능함을 의미하잖아요. 실수를 숨기기 위해 희생도 감수하죠.”

―외모에 자신이 없나요?

“네. 중학교 때는 남학생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대학 때는 미팅도 못 나갔죠.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콤플렉스가 좀 나아졌지만요.”

심리검사 결과는 모두 일반인의 평균치 범주 안에 있었다. 다만 △겉으로는 사교적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고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거부하려는 양상이 있다는 분석이었다.

그는 남녀평등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여자는 이러 저러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교육의 영향을 받아 수동적이고 친절한 여성의 이미지를 지키려 노력해왔다는 해석이 나왔다. ‘좋은 딸’로 인정받으려던 ‘굿 걸 컴플렉스’가 성인기까지 이어진 것.

우울증 지수가 높지 않은데도 우울하거나 마음이 불안하다고 느끼는 것은 직장 내에서 또는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해 정신적 고통이 ‘신체화’ 된 것으로 진단됐다.

의사는 “매사에 ‘좋은 여자’가 되려 몸부림치면 나도 편치 않고 상대방도 피곤하다. 허점도 보이고 신세도 지기 시작하면 더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매사에 자신감…타인시선 너무 의식하는 편 ▼

●한국 중년남성의 심리

점잖은 인상의 B씨(43·패션업체 부장·남)는 스스로를 “직장 내 모임에서 늘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할 정도로 사교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의 몸 또는 정신상태에 대해 답하는 간이정신진단검사의 90문항에서 ‘심하다’고 답한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웬만큼 있다’고 답한 항목은 6개로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 △몸의 일부가 저린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등이었다.

죄책감은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성모와 불효자 같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 장남으로서의 도리를 못하고 있다는 자책 때문인 것으로 추정됐다.

B씨가 그린 그림2.

B씨는 가장 사랑하는 무언가로 ‘어머니’와 ‘배려 정신’을, 성공의 척도로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을 꼽았다.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은 간부 회의에서 경영실적을 보고할 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뭔가요.

“회사 일입니다. 이익을 내야 하는 사업부에 있다보니…. 직원들이나 계열사 사람들 생계가 달려 있으니 책임감을 느끼지요.”

―다른 걱정은….

“우리 나이엔 건강 걱정들 많이 하지 않습니까? 혈압이 한 140∼150 나옵니다.”

―직장 생활은 어떤가요.

“입사 초기에 100여명의 본사 직원들과 협력업체 직원 200여명을 관리했습니다. 직원들이 와서 개인적인 고민들을 털어 놓으면 들어주곤 했지요. 지금도 직원들과는 잘 통해요.”

임상심리사는 집을 하나 그려보라고 주문했다. B씨는 초가집처럼 나지막한 지붕을 가진 가로 4cm, 높이 2.5cm 짜리 작은 집을 단 5초 만에 그렸다. 창문이나 문 같은 외부로 통하는 장치는 없었다. 남자를 그려 보라고 하자 그는 침울한 얼굴을 한, 양복 차림의, 손이 없는 남자를 그렸다. (그림 ②)

로샤검사가 시작되자 B씨는 적잖이 당황했다. 특히 색상이 있는 카드에 대해서는 “이거 무슨 생물체 아닌가요?” 하는 식으로 반문하며 답을 하지 못했다. 색상이 많이 들어있는 로샤카드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답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감성적으로 예민한지 알 수 있다.

그는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낯선 자극에 쉽게 당황하거나 미리 긴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됐다. 또 좋은 이미지만 보이려 하는 ‘자기방어’ 지수가 높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경향이 높았다.

의사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감정을 배제한 채 구체적인 숫자 또는 장소를 제시한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한국 중년 남성의 심리 패턴이다.

그는 내성적인 성향이 강하지만 책임감과 도덕성, 노력이 사교적인 모습을 만들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작은 실수를 지나치게 자책하지 않으면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우울증 또는 신체적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기분 전환의 수단 또는 취미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이 내려졌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조울증 더 심해져 ▼

●조울증이 신체 증상으로

C씨(영양사·27·여)는 주변에 성격 좋은 사람으로 통한다. 화가 나서 쓰러질 것 같아도 고객들을 보면 잘 웃기 때문. 그러나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가 아주 나빠졌다 기복이 심하다.

남자 친구와 6월 말 헤어진 뒤 증세가 더 심해졌다. 일에 대한 의욕도 떨어졌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도 해봤다.

주어를 제시하고 서술어를 완성하게 하는 문장완성검사에서 그는 ‘신경질이 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면 나는…’이라는 문장 뒤에 “쓰러지고 며칠동안 머리가 계속 아프다”고 답했다. ‘언젠가 나는…’→ “멋진 모습으로 사람들이 우러러 볼 것”, ‘내가 바라는 여인상은…’ → “우아하고 똑똑한 여인이다” 등의 답이 이어졌다.

C씨가 테스트 받은 그림3.

―요즘 기분이 어떤가요.

“그냥 답답하고 의욕이 없어요. 제가 오빠(헤어진 남자친구) e메일 비밀 번호를 알거든요. 매일 오빠 메일을 확인하는데 벌써 다른 여자들과 메일을 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그럴 때면 열이 발에서 머리끝까지 올라가는 느낌이라니까요.”

―자신은 어떤 성격이라고 생각 하나요.

“기분 좋으면 교과서 몇 페이지를 1시간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지만 기분이 나쁘면 책을 펴지도 않아요.”

주제통각검사는 흑백 그림을 보고 상황을 이야기로 묘사하게 하는 검사다. 일부 그림에 대한 A씨의 대답.

“이건 한 남자의 무덤 이예요. 귀신같이 생긴 이 사람이 자기 무덤을 보고 있죠. 사람들이 자기 묘비에다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다'는 식으로 평범하게 써줘서 화가 났네요.”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남자는 떠나려고 하고 있어요. 여자가 붙잡고 있네요. 얘기 좀 들어달라고….” 이 대목에서 C씨는 남자친구와의 이별이 떠올랐는지 눈물을 보였다.(그림 ③) 그러더니 남녀가 함께 등장한 그림에 대해서는 “답하기 싫다”고 했다.

임상심리사가 종이를 내밀며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말로 설명하라고 했다.

“내가 연못에 뜬 연꽃 위에서 상어를 잡고 있어요. 상어를 밧줄로 묶어서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요.”

임상심리사는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상어는 무의식적인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것이고 연꽃은 외부로 비춰졌으면 하는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라고 분석했다.

C씨는 인성검사에서 신체화지수(정신적으로 불안정할 때 몸이 아프다고 여기는 정도), 우울증, 히스테리 지수가 67∼82점으로 일반 수준(30∼60점)보다 다소 높았다.

그는 기분이 좋고 활기찬 상태가 지속되는 조증과 우울증이 교차하는 ‘순환성 기분장애(조울증)’로 진단됐다. 의사는 “A씨는 감정이 풍부하고 지극히 정서적이다. 그래서 한 번 우울해지면 현실 감각이 없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C씨는 “장이 좋지 않아 병원도 다니고 한약도 먹고 있지만 낫지 않고, 화가 나서 쓰러질 뻔 한 적이 몇 번 있다”고 했다. 의사는 “머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안 되는 듯한 느낌은 만성 불안으로 인한 증상일 수 있다”며 “감정이 앞서므로 한 템포 쉬었다 행동할 것”을 권했다.

▼심리적 열등감 감추려다 오버액션 하기도 ▼

●낙천성 뒤에 감춰진 산만함

D씨(34·화장품업체 브랜드매니저·남)는 같은 나이 대의 사무직 남성들에 비해 매우 명랑한 인상을 풍겼다. 웃을 때도 앞니를 다 드러내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맑게 웃는다.

문장 완성검사에서도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을 때…’ →“재미있게 즐기는 편이다”, ‘나의 장래는…’→ “무척 밝다” ‘내가 어렸을 때…’ →“참 행복했다” ‘신경질이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면 나는…’ →“조용히 참는 편이다”고 답했다.

인생 최대의 고비는 1990년대 초 벤처 열풍 속에서 회사를 경영하다 5000만원의 빚을 지고 독촉을 받았던 것. 부유하게 자란 그는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D씨사 테스트 받은 그림4

안정된 직장을 여러 번 박차고 나와 지금의 회사를 선택했다. 그는 “정체되는 느낌이 싫고 새로운 일에 호기심이 많아서”라고 말했다. 중학교 때 별명은 ‘괴짜’였다.

D씨는 자신에 대해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성격이며 겁이 많고 낙천적이라고 했다.

그는 로샤검사에서 확실히 어떤 동물처럼 보이는 그림에 대해서는 “날개가 이렇게(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면서) 쫑긋 올라간 새가 날아가는 거예요”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형태가 모호한 그림에서는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한 폭의 동양화 같은데요” “이건 무슨 추상적인 조형물 같아요”라고 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돼지 코 같다” “용이 불을 뿜는 것 같다”는 식으로 형태를 찾으려 애썼던 그림들이다. (그림 ④)

위크엔드팀의 의뢰를 받아 심리검사와 상담을 맡은 정신과 전문의 정찬호씨. “대개의 사람들 마음 속에는 자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낯선 자아, 억눌린 욕구들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자신감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을 인정하지 않고 “괜찮다”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도 있고요.

“아, 예, 낙천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더 편하고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사실은 소심하고 보수적인 면도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예, 저는 친구들과 도박을 해도 1만원만 잃으면 그 길로 손 털고 나옵니다. 사업을 크게 벌이는 스타일도 아니고.”

―심리적인 열등감을 감추려다 보니 ‘오버액션’으로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네, 네, 허허. 친한 친구들은 ‘허풍선이’라고 하죠.”

D씨에게는 ‘계속 긍정적이고 낙관적 사고를 유지하는 것이 스스로의 정신 건강엔 좋음. 하지만 매사를 편하게만 생각하는 것이 남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음’ 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의사는 또 “D씨가 어린 시절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장애’ 증세가 있었으나 고교시절 상당부분 치유된 것 같다”며 “아빠를 닮은 아들도 주의력 테스트를 해볼 것”을 권했다.

▼'흑백'너무 명확…하루 20~30번 손씻어 ▼

●안정적 애정관계 갈망

E씨(41·전업주부·여)는 현재 두 번째 남편, 초등학생인 전 남편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같은 아파트에 치매 증세가 있는 친정어머니(80)가 홀로 산다.

“엄마가 사사건건 간섭하고, TV도 같이 보자고 조르고, 다른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게 해서 미치겠어요.”

그는 무남독녀로 자랐다. ‘돈은 많지만 권위적인 아버지’와는 “겉으로만 좋아하는 척 한 사이”였고 ‘아버지에게 쩔쩔매던 어머니’를 보며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첫 남편의 외도로 결혼 1년 만에 이혼했고 2년 전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두 번째 남편과는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아들과 두 번째 남편은 사이가 원만하다.

E씨가 테스트 받은 그림5.

E씨는 겉으로 보기엔 명랑하고 말도 많았다. 성격이 밝다고 말을 건네자 손사래를 치며 “다 위장하는 거지…”라고 답했다.

―요즘 기분이 어떤가요.

“항상 우울하고 답답하고 왜 이 세상이 내가 없으면 돌아가질 않나 원망스러워요.”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주면 어떻게 하나요.

“들어도 주고, 가끔 못 참겠으면 소리도 지르고 그래요. 이제 나이가 드셔서 노여움도 쉽게 풀고 다시 내게 오니까 죄책감도 느끼게 되죠.”

―어머니가 왜 본인에게 집착한다고 생각하나요.

“보상심리죠. 엄마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 나를 입양했다는 것을 중학교 때 알았어요.”

―충격은 없었나요.

“잘 이겨냈죠.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방황하면서 스스로를 무너뜨릴 순 없었거든요.”

로샤검사에서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길쭉한 형체에 대해 ‘남자 성기’로, 길쭉한 홈이 있거나 빨간 색을 띤 모양에 대해 ‘여자 성기’ 또는 ‘생리대 밑으로 피가 흐르는 모습’이라고 답하는 등 성적인 답변이 많았다. (그림 ⑤)

주제통각검사에서는 혼자 있는 여자에 대해 “아름다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근데 외로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원하는 그림을 설명해 달라’는 주문에 “아까 그 혼자 있던 여자에게 사랑하던 남자가 찾아왔다. 사랑을 이루고 행복하게 산다”고 답했다. 이 검사들은 불안정한 애정관계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으려는 소망을 나타냈다.

E씨는 약속 시간인 2시 정각에 병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사는 강박 정도를 물었다.

―2시 정각에 왔던데 매사가 이렇게 정확한가요.

“네.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쫓기는 기분이에요. 손도 하루에 20∼30번은 씻어요.”

E씨는 인성검사 결과 자신을 믿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자아강도’는 높았다. 하지만 선과 악,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에 대한 구분이 명확했다. 정서적으로 우울 불안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며 항상 삶이 공허하다고 여기는 ‘경계선 인격장애’ 경향이 있다고 나타났다.

또 유아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이 높은데 현재 어머니를 통해 반대의 상황을 접하고 있어 좌절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의사는 E씨에게 “사회학적으로는 흑백논리가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정신건강에는 몹시 해로우므로 적당히 회색분자가 되는 게 좋다”며 항우울제를 일정 기간 복용할 것을 권했다. E씨는 웃으며 “별로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면서도 “얼마나 먹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전문가 진단▼

실험에 참가한 다섯 명을 상담, 분석한 전문의 정씨는 “이들은 병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들을 평균적인 한국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들은 주변에서 “인간성이 좋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안다”, “밝고 명랑하다”는 등의 말을 줄곧 들었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C씨는 상담을 끝낸 뒤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나의) 한 부분을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말했다.

D씨도 “인정하기 싫었던 내 모습을 정확하게 지적받고 신기했다. 점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A씨는 “직장생활을 10년여 해보니 과연 내 정신은 건강한지 의문이 들었다”며 “답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내 속에 있던 것을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번 상담과 분석 결과를 모두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히지는 않았다.

E씨는 “현실에서의 나는 마치 항우울제를 먹은 사람처럼 밝고 명랑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다. 이중적이라는 걸 알지만 변한다는 건 성격상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D씨도 “몇 가지 점을 고치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거라고 했지만 30여년 살면서 얻은 것이 쉽게 고쳐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씨는 “소화가 안 돼 병원을 찾는 사람은 위염이거나 위궤양일 수도 있고 위암일 수 있다. 이번 실험에 참가한 다섯 명 중에는 정신건강이 위암 초기 단계인 사람도 있다”고 분석했다.

정씨는 “많은 사람이 신체건강 검진을 받듯이 정신건강 검진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며 “정신과 병원 안보다 밖에 더 많은 환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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