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주막(酒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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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주막의 모습을 담은 신윤복 풍속화.
조선시대 주막의 모습을 담은 신윤복 풍속화.
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나라가 어수선하다. 1728년(영조 4년) 음력 3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영조가 이복형 경종을 게장으로 ‘독살’했다고 믿는 노론 세력의 반란이었다. 한 해 전 7월, 노론 일부가 실각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반란은 충청도 청주를 기점으로 영남 일대로 번졌다. 반란군의 목표는 분명하다. 한양도성의 궁궐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권 세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권력 핵심으로 향하는 유동인구 통제와 반란 세력의 집결지를 봉쇄하는 것이다.

 난이 일어난 다음 달인 4월 2일, 경기감사 이정제가 보고한다. “(한강의) 송파나루부터 공암나루(서울 강서구 가양동)까지 모든 배들은 강의 북쪽으로 옮겨두고 사사로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지금의 이른바 주막(酒幕)은 옛날의 관정(關亭)으로서, 적도(賊徒)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란세력 혹은 수상쩍은 자들이 묵는 곳은 주막이다. 주막은 예전의 관정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관정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역원(驛院)이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각 지역에 역(驛), 원(院), 참(站), 점(店) 등을 두었다. 공적 업무로 지방에 가는 관리들은 주로 지역 관아의 객사(客舍) 등에서 묵었다. 객사가 없는 곳에서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거나 잠을 잤다. 역은 30리 간격으로 하나씩 세웠다. 역, 원, 참도 없는 산골이나 시골에서는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는 수밖에 없었다.

 주막은 주점(酒店)과 다르다. 주점은 공식적이고 주막은 사설기관이다. ‘막(幕)’은 비바람을 가리려, 임시로 지은 가건물이다. 초기의 주막은 ‘가볍게 술 한잔 마시는 가건물’에서 시작되었다. ‘영업신고’를 하지 않으니 세금도 없다. 세금을 걷는 곳은 통제도 쉽다. 중국 한나라 이후부터 중앙정부는 술을 만들거나 파는 곳에 독점권을 주고 세금을 거두었다. ‘각고((각,교)])’제도다. ‘각’은 독점, ‘고’는 술, 술집을 뜻한다. 주점은 공식적이며 세금을 낸다. 초기 주막은 세금을 내지 않는 가건물로 시작하였다. 난전(亂廛)이다.

 1574년 12월(선조 7년)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선조와의 경연에서 “경기도의 탄막(炭幕)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하여 그 집을 불태웠다”고 보고한다(미암집). 탄막은 주막인데 숙박시설이다. 술도 마시고 잠도 잔다.

 탄막은 땔나무와 숯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덕무(1741∼1793)는 “점은 주막인데, 술(酒)과 숯(炭)의 발음이 비슷하여 ‘술막(酒幕)’이 숯막(炭幕)이 되었다. 관청의 문서에서도 탄막으로 쓰고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주막은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점, 주점, 주막, 탄막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조선의 생산능력이 늘어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동 인구가 늘어난다. 역참을 이용할 수 없는 양민, 상인들은 주막을 이용한다. 전국에 주막이 급격히 늘어났다. ‘간편하게 술 한잔 마시는 공간’으로 시작한 주막은 점차 술 마시고, 식사하고, 잠도 자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정조 13년(1789년) 2월 ‘일성록’의 기록. 황해도 신계에 살던 한조이는 남편의 억울한 유배를 풀어줄 것을 호소한다. “남편 이귀복과 저는 길가에 살면서 탄막으로 업을 삼고 있었습니다. 재작년(1787년) 5월, 나그네가 저희 탄막에 와서 아침을 사먹고 있는데 (황해도) 곡산의 기찰 장교가 그를 잡아가고, 남편도 잡아가서 유배 보냈습니다.”

 호남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젊은 시절 존재가 과거장에 다닐 때 “주막이나 여관(旅店·여점)을 제외하면 단연코 아는 사람 집에서 유숙하거나 남에게 부탁하거나 인정을 바라는 일이 없었다. 한양도성에 들어오면 반촌(泮村)에 세를 들었다. 시험이 끝나면 바로 말을 타고 왜고개(서울 한강로 부근)를 넘었다”고 했다. 존재는 주막과 여관 모두 ‘검소하게 잠자는 곳’으로 여겼다. 물가 비싼 한양에서는 허름한 곳에 세를 들었다. “술 마시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30리마다 큰 팻말을 세우고 나무를 심어 잘 가꾼 곳에 주막을 세우자. 나머지 작은 점포들은 술독을 두지 못하게 하자.”(존재집) 술을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줄이자는 뜻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주막#조선시대#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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