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푸마의 성공경영 "미운오리? 백조였어!"

  • 입력 2003년 1월 9일 16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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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랜드의 푸마 사업부 직원들.신석교기자
(주)이랜드의 푸마 사업부 직원들.신석교기자
1년 내내 즐겁게 일하고, 연말에 성과급으로 1년 연봉에 가까운 돈을 또 받는다면? 그것도 2년 전에는 성과급 한 푼 받지 못하는 ‘퇴출 대상 1순위’의 부서가 2년 연속 사내 최고 성과급의 대상이 된 경우라면?

㈜이랜드의 스포츠 브랜드이자 부서명인 ‘푸마’의 직원 33명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전년도 실적에 대한 포상으로 1100%의 성과급을 받았다. 전원이 1월 중 미국으로 1주일간 휴가도 떠난다. 총 11개 사업부서 가운데 최고의 대우다.

지난해 푸마의 매출은 총 1000억원. 2001년 매출 340억원의 3배에 가까운 성적이다. 2000년 매출은 100억원에 불과했으니 2년 동안 10배 성장한 것이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203억원으로 2001년도(70억원)보다 190% 증가했다.

● 지옥에서 천당까지

독일 축구용품 브랜드인 푸마는 80년대 후반 한국 소비자에게 소개됐다. 한 수입업체가 들여와 마라도나 등 유명 축구선수를 모델로 쓰면서 ‘축구 브랜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푸마의 창시자는 아디다스의 창시자인 아디 다슬러의 동생 루돌프 다슬러. 이랜드는 94년 푸마의 라이선스권을 따왔다.

이랜드는 95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스포츠 브랜드 업계에서 나이키 아디다스 등의 아성이 워낙 강해 성장의 동력을 마련할 수 없었다. 95년 159억원이었던 매출은 96년 178억원, 97년 177억원으로 정체였다. 98년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99억원으로 줄었고, 99년 80억원으로까지 떨어졌다.

97년부터 구조조정을 시행한 이랜드는 99년 48개에 이르렀던 브랜드를 절반 이상 퇴출하고, 직원도 3600명에서 1800명으로 줄였다. 구조조정본부에서 마련한 평가측정 지표에 따라 하위 30%에 해당하면 퇴출 대상이었는데 푸마 사업부가 이 30%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이랜드 경영진은 푸마 사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사업본부장이 적자의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는데 상당히 수긍이 갔다. ‘모기업인 이랜드가 의류업체라 푸마의 라이선스권을 딴 뒤에도 옷에 치중했는데 사실 푸마는 신발이 강한 브랜드다. 그간의 의류 위주 사업구조를 바꾸어 신발을 부각하고, 핵심고객을 잡겠다’는 변화전략을 내놓았다.”(조희상 재무담당 전무·당시 구조조정본부장)

독일 푸마 본사에서도 99년 라이선스 재계약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조희상 전무는 독일로 건너가 한국의 경제상황을 설명하고 본사 관계자들을 설득해 그해 10월 일단 재계약을 했다. 그러나 큰 기대도,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한국 푸마의 위상은 본사에서도 달라졌다. 지난해 8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렸던 아시아 지역 미팅에서 이랜드 푸마 사업부는 성공사례를 발표했다. 한국 푸마는 본사에 “아시안 사이즈로 제품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할 만큼 발언권이 커졌다. 미국 유럽 다음으로 푸마의 큰 시장 역할을 하는 일본은 한국을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마케팅 기법을 배우겠다며 도움을 청한다.

● 처음 나온 브랜드처럼

구조조정 문턱까지 갔던 푸마 사업부의 직원들은 배수진을 쳤다. 변신을 위해 반년 동안 모두 6차례에 걸쳐 시장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은 ‘축구 제품, 오래된 중저가 브랜드, 국산인지 외제인지 정체성 모호’라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유럽 및 일본 문화에 익숙한 10대 후반의 일부 마니아들은 ‘힙합 브랜드, 품질 좋은 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푸마 사업부는 여기에 착안했다. 외제 브랜드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줄 것. 고객층을 10대 후반∼20대 초반의 핵심고객으로 제한할 것.

위험한 도박이 시작됐다. 어린 시절 마라도나에 열광하며 푸마를 찾았던 30, 40대 아저씨 소비자들은 의도적으로 타깃 고객층에서 배제됐다. 헐렁한 트레이닝복 대신 몸에 꼭 붙어 평상복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패션 트레이닝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가 의류도 구매력이 있는 아저씨층이 아니라 젊은층을 타깃으로 만들었다.

“마치 지금까지 한국에 푸마가 없었던 것처럼, 독일 푸마가 새로 한국에 진출한 것처럼 전략을 짜기로 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아성인 기능성 스포츠웨어는 피하고, 틈새시장을 개발해야 했다.”(김태완 마케팅 팀장)

틈새시장은 ‘패션 스포츠 웨어’에서 잡았다. 기능성 시장을 따라잡지 못할 바에는 패션 시장을 잡자는 것. 그러다보니 패션에 민감하면서 스포츠웨어에 관심을 보이는 여성고객이 주요 타깃이 됐다. 당시 스포츠 의류의 색상은 흰색 아니면 검은색 감색 등으로 단순했다. 푸마는 티셔츠에 분홍색 노란색 베이지색 갈색 하늘색 등 일반 캐주얼 브랜드의 색상을 모두 도입했다.

2000년 5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와 명동에 새로운 컨셉트로 50∼88평 규모의 대규모 직영 매장을 열면서 변화는 본격화됐다.

2000년 김태완 마케팅 팀장은 서울 코엑스 매장에서 한 10대 커플 고객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푸마의 대표적인 축구화인 ‘푸마 킹’을 산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축구화 밑창의 스파이크가 좀 불편할 테니 걷기 편하게 갈아주겠다”고 했다. 김 팀장은 이 사소한 장면에서 한국에서 유통되지 않는 ‘아반티’를 신고 싶은 욕구를 포착했다.

‘아반티’는 독일의 유명 디자이너인 질 샌더가 푸마의 축구화인 ‘푸마 킹’을 스니커즈로 변형해 내놓은 제품. 이미 유럽,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고 2000년 초반에는 한국에서도 일부 연예인이 신기 시작했다. 푸마사업부는 곧 독일 본사에 ‘아반티’ 주문을 냈다.

2000년 10월부터 실험을 하듯 전국의 주요 매장별로 아반티를 몇십족씩 팔아보다가 2001년 3월부터는 선금 1만원을 내는 조건으로 예약판매를 했다. 10만9000원짜리 아반티는 당초 3000족 판매가 목표였다. 그러나 가을이 되기 전까지 9000족 이상을 팔았으며 결국 재수입 주문을 냈다. 아반티의 주 소비자는 남녀 중고교생이었다. 푸마 사업부는 이 일을 계기로 10대 시장이 ‘된다’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이후 푸마는 뉴캣, 로마, 네무스, 모스트로 등 스니커즈 브랜드를 잇따라 선보였다.

주요 고객층은 자연스레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20대 중반 이상이 70%, 남성 고객이 90%였지만 2000년부터 10대 후반∼20대 초반이 80%, 여성이 80%를 차지하게 됐다. 예전에는 10∼20평 규모의 노후한 매장만 23개였으나 2년6개월 동안 ‘외국풍’의 매장이 95개로 늘었으며 크기도 최대 80여평 규모로 대형화됐다.

● 행운과 행운을 넘어서는 무엇

푸마의 성공에는 행운도 따랐다. 대표적인 것이 월드컵.

푸마가 제품의 상징색을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바꾼 게 2000년 5월이었다. 젊은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붉은색 티셔츠가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박을 터뜨렸다.

월드컵 스타 안정환 선수의 활약도 컸다. 안 선수는 대표선수로 발탁될 지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던 2002년 3월 푸마와 광고모델 계약을 했다. 그는 지금도 일본 프로리그에서 푸마 옷을 입고 뛰고 있다.

월드컵 한국전 때 푸마 사업부는 발빠르게 잠실 야구경기장을 빌린 뒤 매장을 찾는 고객들에게 무료로 표를 나눠줬다. 3, 4위전까지 7차례에 걸쳐 경기장을 빌린 데 든 돈은 7억원. 그러나 광고효과는 70억원이라는 것이 마케팅팀의 추산이다.

“그동안 취약점이었던 기능성 스포츠 웨어라는 이미지와 외제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월드컵을 통해 견고해졌다. 운이 좋았다”고 김 팀장은 말했다.

그러나 단순히 행운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고 직원들은 느끼고 있다. 월드컵 이후에도 매출이 순항하고 있으며, 당초 변화 경영을 총지휘했던 사업본부장이 1년 동안 투병으로 자리를 비웠는데도 사업은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

직원들은 일주일에 몇 차례씩 자사 매장과 경쟁 브랜드의 매장을 방문하고, 일주일에 한 차례 두세 시간의 난상토론을 벌여 소비자의 변화를 신속하게 경영에 반영한다. 영업팀 김혁 주임은 “그룹사 전체를 대상으로 고객상담실을 운영하다보니 수선을 맡겨도 오래 걸리거나 상담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아 고객의 불만이 높았다”며 “매장에서 이런 불만을 듣고는 6개월 전부터 푸마 전용 고객상담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잘 나가는’ 매장의 영업 노하우를 시스템으로 만들어 모든 매장의 영업력을 균일화하는 작업을 고민 중이다.

조 전무는 “리더 하나가 자리를 비운다고 기업역량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 바로 지식경영”이라며 “푸마는 그 성과가 나타난 대표 부서”라고 말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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