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알뜰 결혼’ 예비부부만 골라…결혼식 사흘 전 웨딩플래너 언니가 잠적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1일 16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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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푼이라도 싸게“ 발품 팔던 커플들 상대로 2억5000만 원 빼돌려
”선납하면 할인“ ”프리랜서 플래너라 수수료 안 떼“ 제안하며 유혹
예식 며칠 앞두고 날벼락…예정된 날짜 맞추려 거액 대출받아 수습

회사원 이모 씨(30)는 결혼식을 열흘 앞둔 17일 웨딩드레스 업체로부터 황당한 연락을 받았다. 이미 지급됐어야 할 드레스 대여료를 입금해달라는 전화였다. 이 씨는 결혼준비를 맡겼던 프리랜서 웨딩플래너 양모 씨(35)에 다급히 연락했다. 양 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에도 며칠간 연락이 끊겼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 씨는 메이크업과 결혼식 연주 대행업체 등에 연락했다. 이들 업체 모두 잔금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입금이 안 돼 예약이 취소된 곳도 있었다. 이 씨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청첩장을 모두 돌린 터라 이 씨는 결혼식을 연기할 수 없었다. 이 씨는 급하게 은행에서 400만 원을 대출받아 다른 업체를 수소문하고 있다.

● ‘알뜰 결혼’ 예비부부만 골라 노렸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각종 예식 업체를 알선해주겠다고 속여 이 씨를 포함한 예비부부 150여 쌍으로부터 2억5000만 원을 받아 챙긴 양 씨를 수사 중이라고 21일 밝혔다. 양 씨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전 소속됐던 웨딩 업체의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지난해부터 불구속 재판을 받다 17일 법정 구속됐다. 양 씨는 불구속으로 재판 받던 중 예비부부를 대상으로 억대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 씨 커플이 양 씨를 알게 된 건 한 인터넷 커뮤니티다.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아둔 돈이 많지 않았던 이 씨 커플은 최대한 저렴한 결혼식을 계획했다. “시중가보다 50만~100만 원 싸게 해 주겠다”는 양 씨의 제안은 꽤 매력적이었다. 이른바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를 포함해 모든 준비를 해주겠다는 양 씨에게 635만 원을 건넸다. 하지만 계약이 성사된 건 한 건도 없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고자 발품을 팔아 알뜰 결혼식을 준비하는 예비부부를 노린 웨딩 사기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강남경찰서는 올 1월 유사한 수법으로 50여 쌍의 예비부부에게 범행을 저지른 프리랜서 플래너 배모 씨(38)를 입건한 바 있다.

● 2차 피해까지 초래

양 씨에게 결혼을 맡겼던 피해자들은 결혼식을 짧게는 사흘, 길게는 두 달을 앞두고 사기를 당했다. 돈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예식 일정과 꼬이는 등 2차 피해가 심각하다. 어떻게든 결혼식 날짜를 맞추려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업체를 알아보느라 드는 시간과 경제적 비용이 적지 않다. 515만 원을 사기 당한 송모 씨(27)는 “회사가 지방이라 직접 알아보기 힘들어 또 플래너를 고용해야 한다”며 “돈 아끼려다 예식 비용만 1000만 원이 넘게 생겼다”고 말했다.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사기 사실을 알게 된 윤모 씨(35)는 “양가 부모님 걱정시켜드릴까 말도 못하고 다른 업체를 알아봐야 했다”고 말했다.

정신적 피해도 심각하다.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198만 원 사기를 당한 장모 씨(36)는 “처음엔 결혼식을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 탓에 남자친구는 위애 출혈 증세까지 있고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다. 몇 푼 아끼려다 평생 기억에 남을 결혼식이 엉망진창이 됐다”며 울먹였다.

본보 취재진이 사기 피해를 당한 예비부부 11쌍을 취재한 결과 모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양 씨를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가성비 높은 ’알뜰 결혼식‘을 치르려 발품 팔던 예비부부들은 “지금 비용을 내면 할인해주겠다”, “예식 촬영은 무료로 해 주겠다”는 양 씨의 말에 속았다.

● ’프리랜서 플래너‘의 요지경 세상

예비부부들이 프리랜서 플래너를 고용하는 건 결혼식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업계에 따르면 ’워킹‘(예비부부가 직접 업체와 계약하는 것을 의미)보다 ’플래너‘가, ’업체 플래너‘보다 ’프리랜서 플래너‘가 적게는 수십만 원, 많게는 수백만 원까지 저렴하다. 강남의 한 드레스 대여업체 관계자는 “플래너는 개인으로 오는 고객과 달리 여러 쌍의 부부를 한번에 소개해줘 박리다매가 가능하다”며 “인기 있는 플래너는 업체에게 갑이나 다름없어 계약금도 없고 예식 후 대금을 치르는 게 관행”이라고 말했다.

프리랜서 대부분은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았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관리체계에서 벗어나 있다. 보증보험도 가입돼 있지 않아 사기 피해는 오롯이 예비부부가 감당한다. 가격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업계 관행도 화를 키운 원인으로 꼽힌다. 업체들은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예비부부들은 플래너 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365만 원 피해를 입은 이모 씨(28)는 “처음엔 절대 가격을 알려주지 않다가 고소에 필요하다며 알려달라고 하니 그제서야 대략의 금액을 말해줄 정도”라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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