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아니, 그녀에게도 성폭행 아픔이…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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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 트라우마/정국 지음/632쪽·2만8000원·블루닷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 옛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남긴 말이다. 잇따라 발생하는 아동 성폭력 사건이 신문지면을 뒤덮고 있지만 같은 경험을 한 어린이 수백만 명은 오늘도 치유하기 힘든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 특별법 제정, 가해자 화학적 거세 같은 대책이 활발히 논의된다 해도 이미 성적 트라우마를 안게 된 아이들에게 치료법이 되진 못한다.

이 책은 통계에 그칠 뻔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경험을 개인의 비극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40년간 성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상담하고 연구해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다.

여러 쪽에 걸친 각종 수치와 통계들은 그 자체로 성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이뤄지는지를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의 3분의 1이 직간접으로 성폭력에 연관돼 있으며 전 세계 여성의 25%, 남성의 10%가량이 성인이 되기 전에 성적 학대를 경험한 것으로 집계됐다. “만약 어떤 질병이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 정도 수치에 달했다면 국가적 비상사태가 선포됐을 것이며 치료책을 위한 연구비도 즉시 마련됐을 것이다.” 미국 ‘성 학대 추방을 위한 어머니 모임’ 창설자 클레어 리브스의 발언을 곱씹다 보면 세상이 성폭력에 얼마나 둔감한지 돌아보게 된다.

사진 제공 동아일보 DB
사진 제공 동아일보 DB
저자가 치료했던 일반인들의 생생한 사례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아동 성학대로 트라우마를 겪었던 유명인사들 이야기다. 유치원생 시절부터 옷 벗기 게임을 했다는 앤젤리나 졸리, 여덟 살 때 침실로 들어온 하숙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메릴린 먼로, 열네 살 때부터 수년간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까지 스크린에서 TV에서, 혹은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 차례로 소개된다.

본인이 확인해주지 않았으나 정황상, 혹은 저자의 추정만으로 성폭력 피해자로 소개된 인물도 적지 않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 등이 그렇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타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책에 소개된 유명인사들이 대부분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책 말미에 실린 ‘부모들을 위한 조언’이나 ‘치료사들을 위한 조언’은 유용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하게, 오랫동안 갖게 된다고 한다. 주변의 누군가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면 당신이 평생 그의 편이라는 점을, 시련을 이기고 나면 더욱 아름답고 심오한 내면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려주면 어떨까.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책의 향기#인문사회#성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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