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횡재한 노숙인, 일본을 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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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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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시마다 마사히코 지음·양윤옥 옮김/360쪽·1만3000원·자음과모음

한 노숙인이 아침에 일어나 누군가가 100만 엔(약 1475만 원)이 담긴 비닐봉투를 놓고 간 것을 발견한다. 노숙인은 뜻밖의 횡재로 이발도 하고, 양복도 빼입고, 고급 초밥집에 가는 호사를 누린다. 하지만 돈 봉투를 동네 부랑배들에게 날치기당하고 깊이 절망한다. 그는 결국 분신자살을 시도하는데 라이터를 켜기 전 문득 깨닫는다. “지렁이처럼 버르적거리며 살아온 내가 어떻게 이런 대담한 행동을 할 마음이 들었는가. 그 돈다발 때문인가? 돈은 인격조차 바꿔버린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총 41장으로 이뤄진 이 장편의 첫 장을 요약하면 이와 같다. 돈이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람 위에 군림한다는 소설의 주제를 잘 요약해 보여준다. 기업이나 국가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1만 엔권 화폐 도안에 들어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작품은 이를 비튼다. ‘돈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든다.’

공고한 돈의 권력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은 악화(惡貨), 즉 위조지폐다. 우울한 소년기를 보낸 도시키는 최신 위폐 감별기에도 잡히지 않는 정교한 1만 엔권 위폐를 대량 유포하고, 일본에는 물가가 거침없이 상승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엔화가 아닌 별도 화폐를 사용하며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회공동체 ‘피안 코뮌’이 위폐의 배후로 수사망에 떠오른다. 도시키가 피안 코뮌에 거액을 지원한 사실도 점차 드러난다.

위폐를 유포하는 일본과 중국의 세력, 이를 쫓는 경찰의 대결은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구도다. 하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다. 자본주의의 전복을 꿈꾸는 혁명가, 도시키가 주장하는 ‘돈의 폐해’에 공감이 갈뿐더러 그의 추락이 새삼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도시키는 말한다. ‘자본주의 승리자는 자본주의에 의해 멸망한 것들을 부활시켜 그 죄를 갚아야할 의무가 있다.’ 실패한 혁명으로 끝났지만 도시키의 문제 제기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책의 향기#문학#악화#시마다 마사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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