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소수를 위한 문화, 주류를 쓰러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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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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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제임스 하킨 지음·고흥동 옮김/1만6000원·336쪽·더숲

책의 부제는 ‘왜 사람들은 더 이상 주류를 좋아하지 않는가’다.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 곳곳에서도 주류 문화가 급격히 균열하고 있다. 발아래 거대한 지반 곳곳에서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 저자는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에너지가 이동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니치(niche)는 틈새를 의미한다. 틈새시장을 뜻하는 ‘니치마켓’은 예전부터 경영학자들이 써오던 용어다. 주변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추구한다는, 주변적이고 소극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나 중심부 곳곳에서 쩍쩍 틈새가 벌어지고 있는 21세기엔 “니치란 더 이상 제3의 길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의 주류이며 대세”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중간층이 소멸하고 사회가 ‘획일적인 대중’에서 ‘잡식성 대중’으로 변모한 것을 지목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테말라 커피와 향이 풍부한 자바산 커피, 감미로운 케냐 블렌드의 차이를 구분하길 간절히 열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1969년 창업해 ‘모든 세대를 위하여: 갭’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승승장구했던 의류 브랜드 갭은 2000년대 들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 이상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브랜드, 평균적인 고객 따위는 없었다. 이처럼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공룡 브랜드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그 대신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 ‘다르게 생각하라’는 모토를 내건 애플, ‘피카소,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전설의 수첩’을 표방한 몰스킨과 같은 회사들은 종교집단처럼 열광적인 추종자를 양산해내고 있다.

영화산업에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개런티를 준 스타배우를 캐스팅한 ‘블록버스터’ 여러 편이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있다. 기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잡식성’ 대중에게 블록버스터는 엄청난 비용과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략이 돼버렸다. 그 대신 요즘은 소수를 대상으로 하지만 열광적인 숭배자를 낳을 수 있는 ‘니치버스터’ 전략이 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정치계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지지층보다는 부동층을 쓸어 담기 위해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중간으로 수렴했던 정당들은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만나지 않았다. 그는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 집단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입소문을 퍼뜨리는 일종의 하위문화를 구축해 엄청난 조직과 자금을 갖춘 경쟁자를 쓰러뜨렸다.

이 책의 장점은 주류가 사라진 ‘니치시대’의 어두운 면도 지적한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관심 분야에 열성적인 신봉자 집단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각각의 집단이 자신만의 구역에 보호막을 치고 남의 말 따위는 귀담아듣지 않게 된다는 것. 저자는 “스스로를 남다른 존재로 정의하겠다는 결의가 지나친 나머지, 개인이나 집단들이 각자 선택한 갑갑하고 비좁은 닭장 속에 갇힌 신세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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