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낡은 모텔 침대에 몸을 누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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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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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한한 지음·김미숙 옮김/288쪽·1만2500원·생각의나무

낯선 길 위에서 마주치는 인간 군상을 그린 로드 픽션 ‘1988’. 생각의나무 제공
낯선 길 위에서 마주치는 인간 군상을 그린 로드 픽션 ‘1988’. 생각의나무 제공
한한(韓寒·29·사진)은 중국 ‘바링허우(八零後·1980년대 출생자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1999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이듬해 낸 첫 장편 ‘삼중문(三重門)’이 중국에서 200만 부 넘게 팔리며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주인공을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와 그런 부모에게 뇌물을 요구하는 부패한 사회를 그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 중국에서 출간된 이 신작도 전작과 사회비판적 궤를 같이한다. 중국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청년층의 고독과 절망을 들춰내고, 부패한 사회를 꼬집는다.

화자인 ‘나’는 교도소에 수감된 뒤 출소를 앞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물 스테이션왜건을 몰고 먼 길을 떠난다. 이 고물차는 폐차 직전의 것을 친구가 고쳐서 ‘나’에게 준 것. 1988년식이라 그냥 ‘1988’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길을 가다 언제 고장 나 멈춰버릴지 모르는 ‘1988’은 ‘나’를 비롯한 바링허우 세대의 불안한 현재를 상징하는 듯하다.

‘나’는 여행의 첫날 허름한 숙소에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성 ‘나나’와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다. 임신 3개월인 ‘나나’는 아이의 친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나’는 친구를 만나야 한다. 이 두 사람이 보낸 닷새간의 여정이 주된 이야기다. 하루 종일 달리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일정은 단순하지만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 묘사와 솔직한 대화들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어느새 ‘나’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 ‘나나’를 돕지만 선을 긋는다. ‘언제나 그녀 곁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우리가 함께 있게 되면 누구의 목적지에도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단순할 수도 있는 평면적인 여정은 ‘나’의 과거 회상 장면이 엇갈려 펼쳐지며 한층 입체감 있게 변한다. 특히 ‘나’가 만났던, 그러나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친구와 선배들의 비극적 결말은 ‘나’를 상실감과 허무함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졸업 후 신문기자가 된 ‘나’가 직면하게 되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은 개인의 의지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나’는 심지어 옛 여자친구와 청개구리 두 마리를 냄비에 넣은 뒤 서서히 가열하며 점차 고통스러워하는 청개구리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보는 듯하다.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듯하고, 허름한 여관의 눅진한 침대에 피곤한 몸을 누인 느낌이다. 간헐적으로 터지는 유쾌한 대사와 상황들도 막상 웃고 난 뒤에는 왠지 짠한 기분을 가져온다. 최근 ‘중국의 하루키’로 불리는 이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간결하고 잔잔하게 청춘들의 방황을 그려낸다.

여정은 닷새 만에 끝난다. 그리고 2년 뒤의 모습이 잔잔히 그려진다. 책장을 덮으면 가슴이 아련해지고, 여운이 깊게 남는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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