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두 학파의 치열한 대립… 조선 뒤흔든 ‘호락논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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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학의 왕국/이경구 지음/384쪽·2만 원·푸른역사

충청도와 서울로 갈린 노론 학자, 마음의 본질-인물성동론 등 논쟁
점차 정파적 파벌 성격 짙어져 세력 나뉘어 적대시하기도
현재 우리 사회 돌아보게 해

호론과 낙론의 뿌리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그의 수제자이자 호론의 시조인 권상하. 호락논쟁의 최고 이론가 한원진과 낙론의 부흥을 이끈 이재(사진 왼쪽부터). 가운데 사진은 낙론의 지도자였던 김창흡의 문인 조영석이 그린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로 학술적인 토론을 펼치던 호락논쟁의 초기 모습과 닮아 있다. 푸른역사 제공
호론과 낙론의 뿌리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그의 수제자이자 호론의 시조인 권상하. 호락논쟁의 최고 이론가 한원진과 낙론의 부흥을 이끈 이재(사진 왼쪽부터). 가운데 사진은 낙론의 지도자였던 김창흡의 문인 조영석이 그린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로 학술적인 토론을 펼치던 호락논쟁의 초기 모습과 닮아 있다. 푸른역사 제공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같은 오상(五常)은 인간과 동물이 하늘로부터 동등하게 받았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온전하지만 동물은 치우쳐 있다는 정도입니다.”(이간·1677∼1727)

“이(理)의 관점에서만 보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氣)로 인해 만물은 제각각 달라지므로 오상 또한 온전할 수가 없죠.”(한원진·1682∼1751)

1709년 봄 충청도 홍주(현재 충남 보령시)의 한산사(寒山寺)에서는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갈 신진 유학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열띤 학술 토론회를 펼쳤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이간과 ‘인물성이론’을 펼친 한원진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의 맥을 잇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 권상하(1641∼1721)의 수제자들이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미묘하게 달랐다. ‘한산사 논쟁’으로 불리는 이들의 토론은 조선 후기 100년을 지배했던 ‘호락(湖洛)논쟁’의 시작을 알렸다.

호락논쟁은 16세기 중반 이황·이이 등이 주도했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과 17세기 후반 왕실의 복제(服制)를 둘러싼 ‘예송(禮訟)’논쟁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논쟁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앞의 두 논쟁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게 현실이다. 논쟁의 시기가 길었고, 개념과 논리가 복잡해 이해하기가 여간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등장인물들의 주변 정보를 풍부히 제공하고, 역사와 철학이론을 교차 편집해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쉽게 읽히는 것이 강점이다.

호론과 낙론이 치열하게 논쟁한 주제는 크게 3가지였다. 미발(未發)로 불리는 마음의 본질과 인성과 물성이 같은지 다른지, 성인과 범인의 마음은 차이가 있는지 등이다. 이 같은 논쟁은 현실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짐승처럼 여기지만 날로 융성하는 오랑캐(청나라)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경제가 성장하면서 존재감이 두드러진 중인·여성·상민들과의 관계 설정 등과 연결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물성동론은 가장 치열한 논쟁이었다. 대체로 낙론에 속한 학자들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했다. 서울을 기반으로 했던 낙론은 학풍이 자유롭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편이었다. 만물의 평등을 강조하면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지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번번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도 없이 야수와 같은 청나라를 용납하자는 말인가”라는 호론의 반발에 부닥친 것.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호론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색채가 짙어 기존 신분제와 성리학적 질서의 유지를 중시했다.

애초 학파의 분화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파적 파벌의 성격이 짙어졌다. 결국 정조(正祖) 말기에는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낙론-시파(時派)와 정권에서 배제된 호론-벽파(僻派)로 나뉘어 서로를 적대시했다. 정조 사후 잠시 호론-벽파가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이후 안동 김씨 가문을 비롯한 낙론-시파 계열이 정권을 독차지해 세도정치를 이끈다.

“낙론은 유연함을 지녔지만 세파를 따르다 스스로 소멸했다. 호론은 차별주의에 사로잡혔지만 적어도 이중적으로 처신하지는 않았다. 비록 시의에 뒤떨어지더라도 언행이 일치했던 그들은 보수의 진면목을 보여줬다”는 저자의 평가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도 진지한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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