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치명적 기상이변 폭염… 언제까지 하늘 탓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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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사회/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홍경탁 옮김/472쪽·2만2000원·글항아리

저자는 에필로그에 폭염으로 숨진 무연고 희생자가 무더기로 묻힌 시카고 교외 묘지를 찾았던 일화를 실었다. 거기서 만난 한 젊은 노동자는 이렇게 되뇌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우리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누구도 원치 않는 천 길 낭떠러지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다. 사진은 표지에 실린 이미지. 글항아리 제공·ⓒ Getty Images Korea
저자는 에필로그에 폭염으로 숨진 무연고 희생자가 무더기로 묻힌 시카고 교외 묘지를 찾았던 일화를 실었다. 거기서 만난 한 젊은 노동자는 이렇게 되뇌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우리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누구도 원치 않는 천 길 낭떠러지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다. 사진은 표지에 실린 이미지. 글항아리 제공·ⓒ Getty Images Korea
꾀는 줄 알면서도 꾀였다.

왜 아니겠는가. 이 날씨에 ‘폭염 사회’라니. 못 본 척하는 게 더 이상하다. 요맘때 이 책을 낸 의도야 뻔하지만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부제처럼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는 이제 우리에게도 절체절명의 화두니까. 흔쾌히 유혹당하련다.

미리 말하면, 이 책은 초판이 2002년에 나왔다. 2015년 나온 재판을 번역했지만, 새로 실린 서문 말곤 ‘옛날 일’이란 소리다.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에서 폭염으로 521명이 사망한 사건을 다뤘으니 자그마치 23년 전. 그런데 ‘지금, 여기’를 마주한 듯한 이 기시감은 뭘까.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재난이 발생했던 시카고 출신. 자기 고향에서 벌어진 사태를 끈질기고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사실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지만, 폭염을 사회학 측면에서 분석한다는 건 여간해선 엄두가 나지 않을 일. 자연재해인 데다 지진이나 태풍처럼 극적이질 않다 보니 더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 때문에라도 폭염에 대한 “사회적 부검(autopsy)”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다.

“대부분의 세월 동안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기상이변은 폭염이었다. 폭염은 소리와 형체 없이 다가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목숨을 걸고 폭염을 무시하고 있다. … 확신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에서 기후변화는 연구와 대중의 참여가 집중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는 점이다.”

얼핏 자연재해는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도 숱하게 겪어 봤지 않나. 대부분 천재(天災)는 인재(人災) 탓에 호미면 됐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당시 시카고 역시 그랬다.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이상고온이지만, 그걸 최소화하기는커녕 기름을 끼얹은 건 인간의 우매함이었다. 저자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점잖게 짚었지만.

물론 폭염이 참화로 이어진 데는 복잡한 요소들이 얽히고설켰다. 희생자들이 대다수 빈곤층 홀몸노인이었던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하지만 시카고의 노스론데일과 사우스론데일은 둘 다 못사는 데다 바로 길 건너 동네인데도 사망률이 크게 차이 났다. 노스론데일은 경제가 낙후되며 많은 주민이 떠난 뒤 범죄자의 터전이 됐다. 이로 인해 노인들은 밖으로 나오질 않고 고립돼 버렸다. 반면 사우스론데일은 가난해도 인구가 밀집돼 여전히 거리에 은행이나 가게가 성행했다. 비상사태가 벌어져도 도움을 구할 지역 커뮤니티 덕분에 최악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정 없는 이웃들 문제라고 봐선 곤란하다. 이 지경이 된 건 위기상황에 대한 시청(혹은 정부)의 대응전략이 부재했고, 응급구조 시스템의 원활한 운용이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갈수록 지자체도 기업처럼 ‘효율성’만 추구하는 경향과 자극적인 사건만 쫓는 언론의 생리도 한몫했다. 나아가 당시 시카고 시장은 약점을 감추는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시정이란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더라도 묵묵히 도시 저변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한데도 말이다.

‘폭염 사회’는 읽을수록 후덥지근해지는 책이다. 아, 저자의 분석은 선명하고 깔끔하다. 곳곳에서 겹쳐지는 우리네 모습이 떠올라서 그렇단 얘기다. 남의 나라도 엇비슷하게 후졌구나 하며 위안 삼기엔 입맛이 씁쓸하다. 해마다 여름은 더 뜨거워진다는데, ‘인재공화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는지. 불현듯 제목이 ‘폭염 지옥’으로 읽힌다. 원제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폭염 사회#에릭 클라이넨버그#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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