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거 지휘 백범 김구를 암살하라” 日帝, 3차례 비밀공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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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활동 日警, 조선총독부에 보낸 ‘對김구특종공작’ 보고서 발견

1938년 5월 7일 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당 당사였던 남목청에서 백범이 조선혁명당 당원에게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밀정을 이용한 일제의 술책이었다. 남목청 건물의 현재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1938년 5월 7일 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당 당사였던 남목청에서 백범이 조선혁명당 당원에게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밀정을 이용한 일제의 술책이었다. 남목청 건물의 현재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백범 김구를 암살하라!”

일제강점기 백범 김구(1876~1949)를 암살하기 위해 일제 당국이 벌인 비밀 공작을 담은 문서가 발견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일제 경찰 히토스키 도헤이(一杉藤平) 사무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대김구특종공작(對金九特種工作)’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백범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최근 이 문건을 일본 야마구치현 문서관에서 확인한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이를 분석한 논문 ‘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에 게재할 예정이다.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중국 상하이로 파견된 히토스키 도헤이 사무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대김구특종공작’ 보고서. 일제가 1935∼1938년 3차례에 걸쳐 실행한 백범 암살 공작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윤대원 연구교수 제공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중국 상하이로 파견된 히토스키 도헤이 사무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대김구특종공작’ 보고서. 일제가 1935∼1938년 3차례에 걸쳐 실행한 백범 암살 공작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윤대원 연구교수 제공

○ 밀정 활용해 공작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의거 이후 일제는 백범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었다.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상하이주둔군 사령부 등 3곳의 합작으로 당시 독립운동가 중 가장 높은 현상금인 60만 원을 내걸며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쳤다.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밀정이었다. 1933년 상하이 파견 경찰 나카노 가즈치(中野勝次)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공산주의자 오대근을 포섭한다. 오대근은 1920년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하지만 중국 현지의 공산주의 세력이 궤멸하며 일제의 첩자로 변절했다.

당시 백범은 난징으로 이동해 장제스와 회담한 후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독립운동 세력 기반을 확대하고 있었다. 1935년 1월 이 소식을 입수한 일제는 오대근을 난징에 급파해 백범을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백범 측에서 이 정보를 입수했고, 오대근 등 일제의 행동원들은 중국 관헌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이후 나카노는 조선으로 돌아와 충청북도 경무부장을 지냈다.

조선총독부는 나카노의 후임으로 히토스키 사무관을 파견한다. 히토스키는 1923년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에 동시 합격한 후 판사를 거쳐 1931년부터 경찰이 된 인물로, 당시 조선총독부의 최고 엘리트 관료였다.

히토스키의 전략은 치밀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밀정 위혜림(본명 위수덕)을 통해 백범과 갈등을 빚고 있던 무정부주의 세력을 이간질해 암살시킨다는 계획이었다. 1935년 8월 이들이 택한 무정부주의자는 정화암과 김오연이었다. 히토스키는 보고서에서 “김오연을 체포한 후 백범의 측근인 안공근이 꾸민 짓으로 부추긴다. 이를 정화암에게 알려 반감을 이용해 백범에게 격발한다”는 계획을 총독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정화암이 이 계략을 눈치 챘다. 정화암은 오히려 허위 정보를 흘리고, 1936년 10월 활동비 300원을 일제에게서 뜯어내는 등 히토스키의 계획을 보기 좋게 틀어지게 만들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이후 일제는 백범 김구 암살 공작을 은밀히 추진했다. 훙커우 의거 직전 백범(왼쪽)과 윤 의사. 동아일보DB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이후 일제는 백범 김구 암살 공작을 은밀히 추진했다. 훙커우 의거 직전 백범(왼쪽)과 윤 의사. 동아일보DB

○ 일제 계략으로 백범 중상

1938년 5월 7일 한국국민당의 백범, 한국독립당의 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이청천 등이 3당 합당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당 당사인 난무팅(남목청)에 모였다. 이날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이 회의장으로 들이닥쳐 권총을 난사했다. 총격으로 백범은 중상을 입었고, 이청천 역시 부상을 입는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남목청 사건’은 합당 운동에 반대한 조선혁명당원이 일으킨 독립운동 세력 간 파벌 다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공범으로 지목된 박창세가 바로 일제의 밀정이었다. 히토스키는 “박창세는 백범의 특무대장이 되어 백범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적당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조선에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으므로 총영사관과 협력해 귀국의 편의를 주고, 회유의 방법으로 삼으려 한다”고 보고서에 기록했다. 1936년 불행히도 그의 계획이 모두 실현돼 박창세의 아들은 조선으로 귀국했고, 박창세가 이운환 등을 꾀어내 백범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백범은 암살 위협을 이겨내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윤 연구교수는 “일제의 백범 암살 공작은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의 내부 분열과 이를 획책했던 일제의 비열한 공작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며 “밀정 연구의 특성상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료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다양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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