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형동검 발굴의 달인… 국내 40점중 18점을 그의 손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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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3> 여수 적량동 고인돌 발굴 이영문 목포대 교수

이영문 목포대 교수가 7월 20일 전남 여수시 GS칼텍스 정유공장 내에 보존된 고인돌 2기 앞에서 발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고인돌 무게는 각각 90t에 이른다. 여수=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영문 목포대 교수가 7월 20일 전남 여수시 GS칼텍스 정유공장 내에 보존된 고인돌 2기 앞에서 발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고인돌 무게는 각각 90t에 이른다. 여수=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지난달 20일 전남 여수시 적량동 GS칼텍스 정유공장. 저유탱크들 사이로 나란히 선 거대한 돌덩이 두 개가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덮개돌 무게만 90t에 이르는 고인돌 2개. 하나는 고임돌 4개가 육중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바둑판식, 다른 것은 덮개돌만 있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화석연료 공장 내부에 있는 거석(巨石)은 선사시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직접 발굴한 이영문 목포대 교수(63)는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대하듯 고인돌 곳곳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는 “반경 500m 안에서 고인돌이 300기나 나왔는데 이 2기는 다른 것들보다 5∼10배나 컸다”며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고인돌처럼 외부로 옮기지 못하고 결국 공장 안에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돌을 바라보며 27년 전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 온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 첫 출토

2009년 전남 여수시 월내동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 동북아지석묘연구소 제공
2009년 전남 여수시 월내동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 동북아지석묘연구소 제공
“선생님, 파괴된 석실에서 동검 조각 같은 게 여럿 나왔습니다.”

“동검? 자네 잘못 본 거 아닌가?”

“3년 전 주암댐에서 나온 것처럼 홈이 파여 있습니다.”

“뭐라고? 당장 그리로 가겠네.”

1989년 1월 18일 여수 적량동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공사 현장. 사업부지 확장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25기를 조사하던 도중 이영문은 제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대어가 걸린 느낌에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붓과 꽃삽을 잡고 조심스레 유물을 노출시키자 비파형동검(銅劍)과 비파형동모(銅모·청동투겁창) 조각들이 보였다. 발굴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여수반도에서 동검과 동모가 처음 출토된 순간이었다.

그해 3월 5일까지 발굴이 진행된 이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 7점과 비파형동모 1점, 관옥 5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비파형동검이 이처럼 많이 나온 건 전례가 없었다. 더구나 고인돌에서 쪼개지지 않고 완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이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동검을 2, 3조각으로 쪼개서 매장하는 게 보통이다. 동경(銅鏡)을 깨뜨려 무덤에 부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완형의 동검이 나온 고인돌(7호)은 보존 상태도 좋았다. 당시 덮개돌과 고임돌 6개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덮개돌을 걷어내자 작은 돌들로 채워진 지하석실이 있었고, 돌무지 아래서 동검이 나왔다. 다음은 이영문의 회고.

“경험상 석실 깊은 데에서 나오는 동검은 오히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7호 고인돌 동검은 불과 지표로부터 20cm 아래에서 출토됐는데 상태가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발굴한 것 중 최고로 치는 유물이죠.”

○ 팠다 하면 비파형동검 우수수…국내서 가장 많이 발굴

고고학계에서 이영문은 비파형동검 발굴의 1인자로 통한다. 그의 손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지금까지 총 18점에 이른다. 전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40여 점)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다.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이 여수반도 고인돌에서 동검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그만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메카’ 전남 화순군이 그의 고향인 것도 마치 고인돌 고고학자의 운명을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고향인 화순 벽송리 마을에 고인돌들이 있어요. 어릴 때 선산을 오가면서 친척들이 ‘이게 뭔데 여기 있느냐’며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그게 고인돌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서야 고인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확 바뀌었다. 전남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9년 해남 북평종합고 교사로 발령받았지만,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내고 전남대 박물관에 들어갔다. 고인돌 발굴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안정적인 교직까지 버린 것이다.

고고학계는 그가 발굴한 비파형동검이 중국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북한을 거쳐 남해안 일대까지 이어지는 동북아 문명교류의 양상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특히 고인돌에서는 세형동검만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기존 학설을 깰 수 있었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묻자 그는 “청동기시대 당시 여수 일대에서 고인돌을 쌓은 집단들의 생활유적을 찾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양한 비파형동검들이 모두 외부에서 전래됐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여수에서 직접 제작했던 장소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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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비파형동검#고인돌#청동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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